본문 바로가기

Text/쿠로코의 농구19

2017년 8월 19일 청흑전력 [직감]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전부터 그의 어떠한 이상 행동을 발견해서 의심하고 있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거 평범한 ‘사람’과 다른 존재라는 것은.그렇기에 지금 같은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이리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를 둘러싼 형상은 분명 사람이 맞았지만, 그가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사실 직감이라는 말은 틀렸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피에 새겨진 약속을 자신의 직감이라고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운명이든 아니든, 어쨌든 아오미네의 예감은 맞았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예감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아오미네는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 빗속을 날.. 2017. 8. 19.
2017년 8월 12일 청흑전력 [손글씨] [손글씨] 닮았네.글자의 획이 꺾어지는 부분이 똑 부러졌다. 날카롭게 모서리각을 세우고,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이어진 직선에는 흔들리거나 망설인 흔적이 없었다. 또박또박, 어린 시절 글쓰기 연습을 할 때 썼던 교본에 나온 글자들 같았다.결코 제 글씨는 아니었다. 때때로 자신이 쓴 글씨도 제가 못 알아보는 정도의 악필인 자신이 이렇게 반듯한 글씨를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가 썼는지 안 썼는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눈에 들어온 글자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테츠가 대신 써줘.’ 엉망인 제 글씨보다, 반듯한 친구의 글씨가 더 좋아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들고 있던 펜을 넘기며 대신 써 달라 졸랐다. 마주 앉은 하늘색 눈동자가 괜찮겠냐고 묻는 듯, 펜을 들고 저를 쳐다보.. 2017. 8. 15.
2017년 7월 29일 청흑전력 [잠옷] [잠옷] [카가밍!!! 들어줘!!! 오늘 간구로가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잠이 덜 깬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쟁쟁한 목소리에 카가미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폈다.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 전까지 진득하게 붙어있던 묵직한 잠을 떨궈내기 위한 움직임일 뿐.지금이 새벽 2시고, 어제 늦게까지 훈련에 참가하느라 몸이 무척 피곤하다던가 하는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카가미는 제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잠든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건만, 그 사이 뼈마디에 벌써 잠이 스몄는지 곳곳이 찌부듯했다. 가볍게 팔을 움직이고 침대 사이드에 걸터앉은 채 다리도 몇 번 쭉 뻗었다가 접기를 반복했.. 2017. 7. 30.
2017년 6월 10일 청흑전력 [사진] [사진] 처음에는 열어볼 생각이 없었다. 우연히 주운 남의 핸드폰의 사진첩 따위. 아마 주운 핸드폰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폰케이스가 끼워져 있다거나, 화려한 장식용 악세사리가 달려있었다면 좀 더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사내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색 케이스가 끼워진 투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그래도 주인은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 화면에 반짝 불을 밝혔던 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누구나 다 해둔다는 홈화면 잠금장치도 해두지 않았는지, 핸드폰은 불이 켜짐과 동시에 스친 손가락에 반응해서 메인 화면을 활짝 열어보였다. “뭐야.” 조심성 없는 사람이네. 아니면 게으른 거든지.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겉만 보았을 때는 아무런 흥미도 동하게 하지 못하던 그 .. 2017. 6. 10.
2017년 6월 3일 청흑전력 [열쇠] [열쇠] “제물은 말하자면 열쇠같은 존재지.” 귓바퀴를 훑는 혀가 스쳐지나간 자리가 뜨거웠다. 물론 아까 전, 인두로 지져진 상처의 뜨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뜨거움이 마치 몸에 독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아……” 저도 모르게 상처가 가득한 목울대를 울리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금까지 자신도 들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이곳에 끌려온 뒤로 툭 하면 내질러야 했던 고통어린 신음 혹은 숨 죽여 삼켜야했던 울음과 다른 것이 목에서 나온 게 대체 얼마만일까?쿠로코는 제가 이곳에 온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차 짐칸에 구겨져서, 그 다음에는 뱃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 배의 밑바닥에 웅크린 채. 그렇게 어딘가로 끌려왔고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두.. 2017. 6. 3.
2017년 5월 20일 청흑전력 [가족] [가족] “테츠 아빠!!!” 한 점의 구김살도 없는, 마치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않은 설원 같은 맑은 목소리에 쿠로코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저를 부르는 소리일리가 없는 단어가 섞여 있었기에 그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사람들이 복작이는 대로변이니, 작은 아이가 인파에 떠밀려 멀어지는 아빠를 힘차게 부른 것이겠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연인이 저를 부르는 애칭인 것은 그래, 그저 아주 작은 우연일 뿐이다.그 해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져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볼 정도의 우연.하지만 쿠로코는 자신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윗옷 끝자락을 꽉 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 힘은 약했지만, 꽤나 고집스러웠다. 결국 쿠로코는 제 옷자락은.. 2017.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