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닮았네.
글자의 획이 꺾어지는 부분이 똑 부러졌다. 날카롭게 모서리각을 세우고,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이어진 직선에는 흔들리거나 망설인 흔적이 없었다. 또박또박, 어린 시절 글쓰기 연습을 할 때 썼던 교본에 나온 글자들 같았다.
결코 제 글씨는 아니었다. 때때로 자신이 쓴 글씨도 제가 못 알아보는 정도의 악필인 자신이 이렇게 반듯한 글씨를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가 썼는지 안 썼는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눈에 들어온 글자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테츠가 대신 써줘.’
엉망인 제 글씨보다, 반듯한 친구의 글씨가 더 좋아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들고 있던 펜을 넘기며 대신 써 달라 졸랐다. 마주 앉은 하늘색 눈동자가 괜찮겠냐고 묻는 듯, 펜을 들고 저를 쳐다보기에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 글씨보다 훨씬 좋아!
흔들릴 것도 없는 짧은 머리카락이 몇 번이나 흔들리는 것을 보던 쿠로코는 그제야 검은 펜을 종이에 가져갔다. 오늘 막 받은 교과서의 빳빳한 겉면에서 신중하게 펜이 내달렸다. 한 획, 한 획, 신중하게 그어내려가는 지라 ‘아오미네 다이키’라는 이름을 쓰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마지막 한 획을 마지막으로 교과서에서 펜이 떨어지니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이름을 쓰는 내내 참았던 숨이 몰아서 터진 듯 꽤나 깊은 울림이 났다.
아오미네는 기억을 따라하듯 한숨을 내쉬며 제 자리의 의자를 뒤로 빼내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제 손에 들려있는 교과서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기 시작했다.
애초에 처음 목적이었던 책상 서랍 정리는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져버렸다. 어제 모모이의 닦달 때문에 사물함은 치워뒀던 터라 치울 곳이 책상 서랍밖에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이곳은 아오미네의 책상서랍에 있던 것이 치워지면 완전히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될 공간이었으므로 빨리 짐들을 비워줘야 했으니까. 사물함까지 짐이 가득 했다면 이렇게 딴청을 피울 시간도 없었을 텐데. 책상서랍을 비우는 일쯤이야 금방 끝날 터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강당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마이크 소리가 끝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졸업식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졸업식이 끝날 때 까지 만이라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게으름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교과서는 분명 1년을 저와 함께 보낸 물건일 터인데도 지나치리만치 깨끗했다. 다른 아이들이 수업을 받으며 필기를 할 때도 저는 수업 진도에 맞는 페이지를 펴는 일도 드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1년 내내 수업이 시작하면 구색이나 맞추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잠을 자거나,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니 교과서에 늘어나는 건 말라붙은 침자국과 어설픈 펜놀림으로 그려놓은 낙서가 전부였다.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교과서 속 위인들의 얼굴에는 수염이며 상처로 성한 구석이 없었다. 원래 교과서에 쓰여 있던 글자들에 획을 더해 이상한 문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도 눈에 띄었다.
여백에 그려진 어린 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들도 꽤나 다양했다. 물고기, 농구공, 여자의 가슴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은 흔적. 그런데 제법 구체적인 햄버거 그림 옆에 있는 것은 제가 그린 것이 아니었다.
아래가 좀 더 좁은 원통 위에 덮인 플라스틱 덮개. 그리고 그 위에 꽂힌 빨대. 원통 중앙에 적힌 이니셜 M. 아, 그래 이건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의 저녁 메뉴였다. 시험 기간을 맞아 농구부 활동도 쉬는 날이었던 탓에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공부를 하는 흉내라도 내야겠다며 도서관에 갔더랬다.
하지만 역시나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끄적 하던 것은 한 시간을 채 이어지지 못했다. 배고프다.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교과서의 여백에 햄버거를 그려 넣었다. 나름 데리야끼 소스를 티낸다며 빵과 빵 사이에 검은색을 두껍게 칠해두기도 했다. 노트 필기보다 더 집중해서 그것을 그리는 동안 아오미네는 제 옆에 앉아 교과서를 읽던 쿠로코가 어느새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나름 흡족한 햄버거 모양이 완성 되어 펜을 뗀 순간 옆에서 불쑥 손 하나가 다가와서 흠칫 놀랐다. 파란색 펜을 든 쿠로코의 하얀 손은 햄버거 옆에 동그란 원통을 그리기 시작했다. 뚜껑도 얹어주고, 빨대도 꽂아주고.
차례차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처럼 세트같은 햄버거와 쉐이크 통이 완성될 때까지 아오미네도 그걸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완성 된 세트메뉴를 보고 마주 웃던 두 사람이 공부를 그만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지바로 향한 것도, 그 날 공부했던 과목 시험을 나란히 망쳤던 것도. 너무도 기억이 선명했다.
아오미네는 제가 잊고 있던 것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담긴 교과서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사진을 찍는데 별 취미가 없던 자신과 쿠로코는 제대로 함께 찍은 사진도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보아도 쿠로코의 웃는 얼굴을 지금처럼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쿠로코가 부활에 안 나오게 된 이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자신이 그의 주먹에 주먹을 맞대지 않았던 이 후. 그 때부터 보기 힘들어진 과거의 표정들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것은 곁에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언제나 혼자 있었기에. 그렇기에 불현 듯 울컥 치밀어 오르는 ‘보고 싶다’는 감정은 한 번도 해소되지 못했다. 울컥 치미는 토악질을 끝내 하지 못해 아픔이 쌓이듯, 그리움은 가슴에 켜켜에 고여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 있었다. 펜으로 새겨진 추억들은 제가 돌아보지 않는 사이에도 항상 그곳에 있었다.
문득, 교과서를 넘기던 아오미네의 손이 멈췄다. 좀처럼 글자가 써진 게 없던 교과서에 익숙한 글자가 단정하게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교과서의 가장 앞 쪽, 제 이름자를 새겨준 바로 그 글씨였다.
‘고맙습니다.’
숨이 막혔다.
터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쌓여만 왔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기분이었다.
지금껏 밖으로 내지 못했던 감정이 벽을 허물고 범람해 버렸다.
이 글씨 또한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봄치고는 유난히 더웠던 지난 날, 막 하복을 입었던 날이었다. 긴 옷에 가려졌던 팔뚝이 드러나 짧은 하복 반팔 밖으로 흰빛이 두드러졌다. 그것에 시선이 뺏겨 자신에게 내밀고 있던 교과서를 좀 늦게 받아버렸다.
왜 그러냐고, 의아한 얼굴을 하는 쿠로코의 표정에 한 템포 늦게 별거 아니라는 듯 빌려줬던 교과서를 받아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잘 보지도 않는 것이었기에 한순간의 어색한 공기를 날릴 겸 돌려받은 교과서를 파라락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가장 최근에 펼쳐졌던 탓에 눌러진 흔적이 있는 페이지에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멎었다. 정확히는 그 페이지 오른쪽 여백에 적힌 글자에 시선이 멎었다.
시선의 움직임에 아오미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차렸는지, 쿠로코는 작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잘 썼습니다. 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쿠로코는 뒤를 돌아 교실로 돌아갔다. 아오미네의 교실과 쿠로코의 교실은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지금부터 돌아가면 수업종이 치기 전에 알맞게 자리에 앉을 수 있을 터였다.
‘다음에 또 빌려줄게!!’
그 뒤통수에 대고 저도 모르게 그 말을 꺼냈던 것은. 그의 감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말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것 마냥 들떠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다음에 또 빌려줄게! 그러니까 또 고맙다고 말해줘! 그 마음이 어쩌면 그에게도 들렸을지도.
앞을 보고 걷던 쿠로코는 뒤돌아서더니 저를 향해 한 손을 흔들고 있는 아오미네에게 미소를 보였다.
‘다음에 또 교과서를 두고 오라는 말입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만약 또 두고 오게 된다면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웃었던 것 같다. 아니, 분명 웃었다. 장난스러운 대답에 장난스럽게 답하며 웃음에 웃음으로 답을 했더랬다.
그랬던 날이 있었다.
아오미네는 천천히 검지를 세워 교과서에 쓰여 있는 글자를 따라 움직여보았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손글씨를 쓰는 동안 귓가에서는 그 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목소리가 작별 인사처럼 들리는 걸까.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아오미네는 오늘 짧은 순간 마주쳤던 쿠로코의 시선을 떠올렸다.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졸업식에는 모습을 보였기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쿠로코만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한 순간, 뒤로 고개를 돌린 쿠로코와 시선이 마주쳤었다.
금방 외면 받지 않고, 한 동안 서로를 마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은 쿠로코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앞을 바라보는 걸로 끝을 맺었다. 그 순간 쿵, 떨어진 심장이 아오미네를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했다. 빨리, 빨리, 어서 그에게서 외면 받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심정뿐이었다.
그렇게 졸업식이 열리는 강당을 빠져나가 이곳에 왔던 것인데. 그랬는데, 또 그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세이린이라는 학교를 가기로 했다고, 모모이가 전한 쿠로코의 근황은 이별이라는 결말의 종지부를 날리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자신과 그는 다른 길로 갈 것이다. 어쩌면 이건, 네가 그런 나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인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과거의 그날 들었던 감사 인사가, 이제는 작별 인사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오미네는 인사를 거절하듯 교과서를 덮었다. 그리고 처음 이 교과서를 받은 날, 그가 써 주었던 제 이름을 손가락으로 따라 써 보았다. 이제 완전히 잉크가 말라버린 검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이 비틀, 비틀, 마치 상처입은 사람처럼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오미네 군, 아오미네 군.
감사의 인사를 따라 썼을 때처럼, 반듯한 그 글자를 따라 쓸 때마다 글자를 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 목소리가, 그가. 언제나 제 곁에 있었던 것을 스스로 버린 후에야 알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아오미네 군.”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저를 버리지 않았음을
“아직 그 날의 주먹을 아직 맞대지 못했습니다.”
모르던 날의 일이었다.
단지, 아오미네 군이 웃으면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쿠로코가 그렇게 괴로워도 농구를 포기 못한 이유가 단 한 사람 때문이라는 건 언제 들어도 최고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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