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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쿠로코의 농구

2017년 6월 3일 청흑전력 [열쇠]

by 자렌Jaren 2017. 6. 3.

[열쇠]


 


제물은 말하자면 열쇠같은 존재지.”

 

귓바퀴를 훑는 혀가 스쳐지나간 자리가 뜨거웠다. 물론 아까 전, 인두로 지져진 상처의 뜨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뜨거움이 마치 몸에 독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

 

저도 모르게 상처가 가득한 목울대를 울리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금까지 자신도 들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이곳에 끌려온 뒤로 툭 하면 내질러야 했던 고통어린 신음 혹은 숨 죽여 삼켜야했던 울음과 다른 것이 목에서 나온 게 대체 얼마만일까?

쿠로코는 제가 이곳에 온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차 짐칸에 구겨져서, 그 다음에는 뱃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 배의 밑바닥에 웅크린 채. 그렇게 어딘가로 끌려왔고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끌려 들어온 뒤로는 해가 몇 번을 떴다가 졌는지 알지 못했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벽에 걸린 사슬에 손목이 묶인 채로 지내는데 며칠이 지났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지 아예 짐작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얼굴을 가린 이들이 나타나 푸른 날이 선 칼로 팔뚝을 그었다. 마치 칼로 편지 봉투의 밀봉 된 입구를 찢어 열 듯, 무심하게 휘두른 칼날이 피부를 벌리며 붉은 피를 뚝뚝 토해내게 했다.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를라치면, 입 안으로 구역질나는 냄새가 밴 천이 밀려들었다. 욱욱, 울음과 비명이 뭉개져 이상한 소리가 나는 동안 그들은 흘러나온 피를 그릇에 받아들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렇게 벌어진 상처에서 나온 피가 마르기도 전에 종아리에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닿아 피부가 타는 냄새가 연기마냥 자욱하게 좁은 방을 메우기도 했다. 태우고, 찌르고, 긋고, 인간이 할 수 있는 학대의 범위를 연구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그들은 시간이 되면 찾아와 이미 망가진 몸에서도 더 망가트릴 부분을 찾아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자리도 없게 되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참으로 집요하게도 매일 무슨 의식을 치르듯 상처를 늘리고 고통을 쥐어짜냈다.

쿠로코는 전에 일했던 이모부의 포도농장을 떠올렸다. 일꾼들을 줄이겠다며, 짠돌이 이모부가 포도를 짜내는 기계를 들여왔었다. 그 기계는 일꾼들이 달라붙어 몇 시간이 발로 콱콱 밟아 으깨던 포도를 더 빠른 시간에 많이 뭉개놓았다. 그때는 기계의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지만, 쿠로코는 어쩌면 그 기계의 안쪽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쥐어 짜내지고, 망가지고, 으깨졌다. 어쩌면 정말 그 기계는 자신의 삶에 찾아온 첫 번째 악마였을지도 몰랐다. 기계 덕분에 일꾼을 줄이게 된 이모부가 쓸데없이 떠맡았던 고아 조카를 팔아치울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니까.

 

그게 바로 소환자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야. 그들은 열쇠를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면 모든 걸 자기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거든.”

 

달달 떨리는 턱 아래로 커다랗지만 서늘한 손이 와 닿았다. 거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손은 제 검지 위에 쿠로코의 턱을 부드럽게 올려둔 뒤 슬그머니 얼굴을 위로 들게 했다. 이미 녹아 없어졌다 생각했던 뼈들이 깨어나고, 쿠로코는 다행히 아직까지 부러지지 않은 목뼈가 움직여 제 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아까부터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존재의 얼굴이 무척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서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던 신세였으니.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야. 열쇠는 제물이야. 열쇠가 원하지 않는다면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지.”

 

속삭여지는 목소리는 낮고 거칠지만, 여유로운 말투에서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짧은 머리카락은 어둠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여 처음에는 짙은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허공에서 떠올라 주변을 밝히기 시작한 불에 비쳐보니 푸른색이 감돌고 있었다. 오히려 어둠이 스몄다는 생각이 드는 건 강인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였다.

훌쩍 키가 큰 정체불명의 사람은 여전히 양 손목을 벽에 달린 사슬에 묶인 채 늘어져 있던 쿠로코에게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곤 쿠로코가 제 설명을 잘 듣고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씨익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모든 선택권은 제물인 너한테 있는 거야.”

 

악마를 불러내겠다고 아이 하나를 잡아와서 학대하고 있는 저 머저리들이 아니라.

너한테 있어.

 

악마, 제물, 학대.

 

쿠로코는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이가 어떤 이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술집에서 어른들이 떠들어대던 말도 안 되는 헛소문 속에. 사촌이 보기 싫다고 내다버린 낡은 동화책 속에. 부당하게 쫓겨나며 이모부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던 일꾼들의 외침 속에.

그것들 속에 숨어있던 그 존재가 자신 앞에 있었다. 그리고 악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하자.”

 

악마가 인간계에 마음대로 드나들려면 문을 열어줄 열쇠가 필요하지.

네가 내 새로운 열쇠가 돼.

그럼 나는 네가 바라는 걸 들어줄 거야.

악마는 계약의 대가로 분명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고 했다. 힘이 강한 악마일수록 더욱 강한 제물이, 대가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제게 뻗어진 손이 진작 찢어져 너덜너덜해져버린 셔츠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달뜨기 시작하는 몸의 열이 대가가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게 했다.

쿠로코는 이미 힘이 빠져 들어올리기도 힘든 팔을 힘겹게 올렸다. 절그럭, 바닥에 늘어져 있던 쇠사슬이 딱딱한 돌바닥을 스치며 울었다. 하지만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쿠로코는 이미 손톱이 뽑힌 제 손을 들어 제 앞에 있는 이의 양 볼에 가져다 댔다.

숨소리가 드릴 정도로 가까웠던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엉망진창인 입술이 제 앞에 있는 이의 입술을 덮으며 둘 사이의 거리는 사라졌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아까부터 제 몸에 닿는 손이 몸 속에서 피어나게 하는 열기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어렸지만 험한 삶을 살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도 가까이 접했다.

그런 삶을 살다가도 더 밑바닥으로,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인생이 너무도 목구멍을 조여서 생명이 경각에 달린 지금 대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복수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입술이 부딪치자 계속해서 물을 마시지 못해 마른입 안으로 물기 어린 혀가 밀려들었다. 인간의 것과 다름없는 축축하고 말캉한 감각에 숨이 막혔다. 뜨겁고 두터운 것이 이를 가르고, 안에 숨은 혀를 얽어 춥, 빨아들이자 확 불이 붙은 듯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이미 아킬레스건을 잘려 움직이기 힘들게 되지만 않았다면,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배배 꼬았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자극은 강렬했고, 머릿속이 텅 빌 만큼 아찔했다. 하지만 이내 쿠로코는 제 입안으로 훅, 불어넣어지는 숨결과 함께 다가온 마지막 말에 정신을 차렸다.

 

좋아지금 네가 가장 원하는 걸 말해 봐.


쿠로코는 제게 다가오는 달콤한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든지, 이루어줄 것만 같은 마법 같은 저 속삭임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쿠로코는 어린 시절 지붕에 몰래 동화 한 닢을 던지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던 일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제발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자신을 원래 집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빌었던 어린 아이는 지금,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의 목을끌어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빌 소원은 정해져 있었다. 제 입술을 질척하게 핥는 오는 악마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며 쿠로코는 웃었다. 제 생에 가장 큰 행운을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악마 미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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