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카가밍!!! 들어줘!!! 오늘 간구로가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잠이 덜 깬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쟁쟁한 목소리에 카가미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폈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 전까지 진득하게 붙어있던 묵직한 잠을 떨궈내기 위한 움직임일 뿐.
지금이 새벽 2시고, 어제 늦게까지 훈련에 참가하느라 몸이 무척 피곤하다던가 하는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카가미는 제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잠든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건만, 그 사이 뼈마디에 벌써 잠이 스몄는지 곳곳이 찌부듯했다. 가볍게 팔을 움직이고 침대 사이드에 걸터앉은 채 다리도 몇 번 쭉 뻗었다가 접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에도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오른쪽 어깨와 얼굴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 있었기에 불만이 통통 튀는 목소리는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선물을 살 때까지 몇 번이나 백화점을 돌아다녔어! 애초에 내가 말한 만년필을 제때 주문했으면 됐잖아!]
짐작은 갔다. 지금 모모이가 말하는 ‘선물’이 누구에게로 갈 것 인지. 자신 또한 얼마 전에 일본으로 가는 소포를 하나 붙이지 않았던가. 분명 모모이와 오늘 모모이를 화나게 한 사람 또한 자신이 보낸 소포의 주인에게 줄 선물을 고른 것일 터였다.
카가미는 몸이 좀 풀리자 고개를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 지내고 있는 것치고 넓은 방은 걸음을 조금 옮겨야 창문가에 닿을 수 있는 넓이였다. 펼쳐 놓는 것이 무의미해서 커튼을 양 옆으로 걷어 놓은 덕분에 창문은 먹물이 묻은 듯 새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시에서는 건물들이 뱉는 불빛 때문에 하늘의 별빛이 가려진다고 했던가. 아니면 대기오염 때문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하늘높은 줄 모르고 길게 뻗은 건물들 사이로 엿 보이는 하늘은 별이나 달이 없이 온통 까맣기만 해서 바라보는 재미는 없었다.
별 대신 아직도 환한 빛을 밝히고 있는 건물들을 바라다보며 카가미는 창문을 열었다.
갇혀있던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가고, 뭉근한 바깥 공기가 훅 콧잔등을 때렸다. 이제 완연한 여름 색을 띠는 계절은 뜨거움으로 가득해서 밤에도 좀처럼 열기를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 덕에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에어컨 바람에 의지해서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인공적이지 않은 공기를 인공호흡 하듯이 폐에 집어 넣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했다.
[미리 무슨 일인지 말을 해줬으면 신발이라도 편한 걸 신고 나갔을 텐데…… 미리 말도 안 해주는 바람에 힐을 신고 백화점을 뱅뱅 도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거 있지!]
“…피곤했겠네.”
여자들의 하이힐은 카가미에게 있어서 언제나 감탄의 영역이었다. 자신이라면 신고 한두 발짝도 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을 신고 잘도 걸어 다닌다 싶었으니까.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듯이 내뱉어버린 것이었는데…… 그 말을 내뱉은 후에 카가미는 아차 싶어서 가볍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 오늘은 타이밍이 좀 빨랐다.
[아, 그러고 보니 미국은 지금 새벽이었지…… 미안, 카가밍. 또 깨워버렸네.]
이런 사과가 듣고 싶지 않아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조금 더 바깥바람을 맞아 잠이 가시고 난 후에 입을 열었어야 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상대의 상태를 민감하게 캐치해내는 이 사람은, 아직 잠기운이 붙어 잠겨있는 목소리를 대번에 알아 챌 테니까.
젓가락만큼이나 얇은 굽으로도 사뿐사뿐 잘 걸어 다니는 이들에 대한 놀라움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하는 바람에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 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괜찮아.”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내뱉는 말에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귓가에 가벼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 더 들려온 정말 괜찮냐는 물음은 역시 그녀가 상냥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다만 처음 전화를 걸 때는 그 상냥함이 발휘되기도 전에 화가 벌컥 튀어 나와 버렸으리라. 그 화가 단축번호를 꾸욱 누를 때까지도 억눌러지지 않아 시간을 생각 못하고 무작정 전화를 걸어버린 것이다. 앞뒤 모든 상황을 알고 있어 제 짜증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카가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카가밍도 선물 보냈어?]
“혹시 몰라서 저번주에 미리 보내뒀어. 국제 배송은 느릴 때가 종종 있으니까.”
[역시 카가밍은 다정하네. 올해 선물은 뭐야?]
그 순간 자신이 지난주에 포장을 해서 쿠로코의 앞으로 보낸 물건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물건의 모양부터 포장지의 색깔, 그 포장지를 감싸고 있던 리본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났다.
“지난번에 쿠로코가 없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생각해보면 모모이와 이런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도 모두 그 선물이 원인이었더랬다.
커플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자신이 혼자서 정하기 한 없이 어려운 용도의 선물을 해야할 위기를 앞에 놓고 자신이 SOS를 친 상대가 바로 모모이였으니 말이다.
처음 쿠로코에게 모모이의 연락처를 물어보았을 때는 쿠로코도 왜 그런 것을 궁금해 하냐며 의아해 했었다. 카가미에게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겠냐고 모모이에게 쿠로코가 물어보자, 그럼 자기가 먼저 연락을 하겠다고 먼저 번호를 받아갔다고 들었을 때만해도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처음 보는 번호로 걸려온 국제 전화에서 제법 익숙한 소리가 들렸을 때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더랬다.
‘카가밍, 내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야?’
밝고 활기찬, 몇 년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은 친근한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주저하고 고민하던 것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도대체 커플에게는 어떤 선물을 사야할지 몰라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는 말에 가볍게 울리던 웃음소리는 일본의 여름을 떠올리게했다.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자아내는 소리처럼, 그 웃음소리는 맑고 선명하게 귓전을 채웠으니까.
그뒤로 종종 상담을 하느라 통화를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번호를 단축번호에 넣었고, 그 번호를 누르는데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제 선물을 의논하지 않아도 대략 어떤 것을 사야할지 알게 되어서 선물을 상담하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인연은 즐겁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걸 샀는데? 궁금해!]
잠시 옛이야기들을 생각하다가 말이 멈춘 탓에 상대를 기다리게 했나보다. 답을 재촉하는 말에 카가미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선물의 포장지를 풀었다.
“잠옷. 지난번에 쿠로코가 없다고 한 게 생각나서.”
사실 한 벌만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이렇게나 서툴러서 앞에 붙었어야 할 단어를 생략해 버린 답이었다.
하지만 모모이의 귀에는 지워진 단어가 고스란히 들렸다.
[커플 잠옷?]
화들짝 놀라 외치는 목소리에 카가미도 덩달아 놀라버렸다. 바깥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목덜미에 솟아나기 시작한 땀방울을 핥는 것이 불쾌해서 창문을 다시 닫으려던 손길도 순간 멈췄을 정도였다.
그 놀란 목소리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그 의심은 사실이 되었고.
[나도 같은 걸로 선물했는데!]
탁, 문을 닫는 순간 방은 다시 세상과 분리되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낮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도가 3도쯤은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던 더운 기운들을 거침없이 몰아내는 찬바람 때문일까. 잠깐이라도 더웠던 곳에서 완전히 시원한 곳으로 들어온 순간 돋은 소름에 가볍게 몸이 떨리며 몸이 바짝 긴장됐다. 하지만 귓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뭔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어 금세 긴장을 풀며 하하, 웃어버렸다.
“두 벌이니까 번갈아서 입으라고 해.”
뭐 어때. 목소리가 가벼운 건 모모이의 걱정을 풀어주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정말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잠옷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됐던 대화를 곱씹어보니 이런 일이 생길 법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가미 군과 모모이 씨가 매해 선물을 챙겨주는 통에 집에 이제 커플이 아닌 물건이 없을 정도입니다. 커플 베개, 커플 머그컵, 커플 쿠션. 작년에는 모모이 씨가 커플 식기까지 선물해주셔서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커플용 물건을 보는 기분입니다.
기쁜 듯, 우스운 듯, 그렇게 털어놓은 목소리를 들은 건 8월에 접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8월 말에 있을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흘러가듯이 나온 투덜거림. 아니, 투정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다지 불만이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던가.
어쨌든 나쁘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제가 그 날 들은 것을 선물하게 된 것이지만.
그나마 커플 잠옷이 아닌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자고 한 이야기였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걸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불쾌함이 아닌 웃음을 줄 수 있는 장난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물건.
그런데 저런 투덜거림을 자신에게 했다면 모모이에게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아니, 역시 큰 문제는 아닌가. 어차피 잠옷이 한 벌이든 두 벌이든 그건 큰 문제는 아니지. 아무렴.
[카가밍… 사실 두 벌이 아니야……]
“무슨 말이야?”
자신이 선물로 보내준 것은 하나, 그리고 모모이가 선물했다는 것이 하나. 그러면 두 벌이 아닌가?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화 너머 상대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당연히 볼 수 없을테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잠시 주저하는 듯 했던 모모이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오늘 아오미네 군도 선물을 사러 다녔다고 했잖아.]
“그게 왜…아, 설마……”
[응… 커플 잠옷을 사기에 말릴까도 했는데…… 내가 뭘 샀는지 미리 밝히고 싶지 않아서 못 말렸어……]
커플 잠옷을 사겠다는 아오미네를 말리려면 정당한 이유를 대야하는데, 그렇다고 거기서 ‘내가 선물로 잠옷을 샀으니까!’라고 말하면 미리 선물을 들켜버린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선물을 하는 건데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없잖아! 라고 모모이가 말했던 적이 있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녀다운 선택을 한 것이었다.
물론, 카가미까지 잠옷을 선물로 보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뭐… 괜찮지 않겠어?”
기분 내킬 때마다 돌려 입을 수도 있겠네.
물론 처음 선물 상자를 뜯었을 때는 조금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웃어버릴 것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져서 대체 이게 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웃음이 즐거움에서 우러날 것임을 알기에 카가미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생일과 똑같은 날짜에 쿠로코를 호적에 올려버리는 바람에, 제 생일날 자신이 제 결혼 기념일 선물을 찾으러 다니는 처지가 된 아오미네라면 자신의 선물과 카가미가 보내준 선물이 똑같다는 것에 조금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자고 미리 짠 것도 아닌 것을.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렇네. 하지만 내년에는 미리 뭘 보낼지 이야기하자!!]
다음에는 꼭 겹치지 않는 걸로 테츠 군을 놀라 게 해줄 거야!!
다부지게 말하는 목소리에 알겠노라 대답하며 카가미는 이만 끊겠다는 인사를 전했다. 잠을 깨워 미안했다는 또 한번의 사과와 함께 작별 인사가 전해지고, 통화는 끝났다.
짧은 사이 후끈해진 전화기를 귀에서 떼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체온을 식혀주었다.
며칠 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전달받은 카가미는 그 여름밤의 해프닝을 생각하며 웃어버렸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지 않은 손으로 쿠로코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아오미네와 그런 아오미네의 가슴팍에 자연스레 기대고 있는 쿠로코.
잠옷 차림으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의 상의와 하의는 세트가 아니었다. 카가미의 눈에 익은 옷은 쿠로코가 입은 하의 하나, 상의는 아마도 모모이나 아오미네가 사온 것이겠지.
아오미네 또한 쿠로코와 전혀 다른 디자인의 상의를 입고 있었고, 아마 쿠로코가 입은 상의와 같은 디자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하의를 입고 있었다.
카가미는 선물 받은 세 벌을 나름대로 하나씩 다 갖춰 입은 그 엉뚱한 사진에 터져버린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메신저 너머 상대를 향해 하나의 답문을 보냈다.
[이미 커플 잠옷이 아니잖아, 그거.]
처음으로 세트가 아닌 걸 선물해줘 버렸네.
뭐, 그래도 행복해보이니 다행이지만.
변하지 않았기에 행복한 모습을 저장해 두며 카가미는 몸을 일으켰다. 나눠받은 행복 덕분일까 연습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은 가벼운, 그런 날이었다.
청흑이 안 나오는 청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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