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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내스급

2020년 9월 12일 유현유진 전력 [제복]

by 자렌Jaren 2020. 9. 12.

 

* 채터박스 장례식 게임 내용에 대한 네타가 아주 조금 있습니다.

* ㄱㅊㅊㅈ과 ㄷㄷ이라는 단어의 정체를 모르시는 분은 읽지 않으시는 걸 권합니다.

* 퇴고 X

 

 

 

유현이 앞에서는 괜한 말하는 걸 좀 줄여야 하나?

유진이 침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지금이 광경이 자신의 어떤 말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머리가 지금보다 조금만 덜 똑똑했더라면, 차라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유진의 머리는 지금도 팽팽 굴러갈 만큼 똑똑했고. 채터박스의 게임이 끝나고 저도 모르게 유현에게 뱉어버린 말은 지금 와서 돌이킬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눈앞에 닥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은 용기 내어 방 안으로 발을 한 발 디디며 침실 문을 꼭 잠갔다. 최소한 남의 눈에 띄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찰칵 문이 잘 잠겼는지 문고리를 한 번 돌려 확인하는 행동으로 선명히 드러났다.

이정도면, 놀랐지만 그걸 크게 티내지 않고 잘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유진은 침대로 향했다. 좋아, 방을 가로지르는 걸음 또한 평범하게. 너무 놀라서 후다닥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당했다.

다행히 걸음이 꼬이는 실수 같은 것도 저지르지 않고 무사히 침대 앞에 도착한 유진은 여전히 자신이 최대한 평소와 같은 상태인 것으로 보이길 바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유현아, 너 잠옷은 어쩌고 그걸 입고 있냐?”

 

이거, 그거, 그러니까 저거! 아무리 봐도 그 게임에서 입었던 경찰청장의 제복이 분명한 옷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그 옷을 어떻게 가지고 나왔냐? 채터박스 파티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냐? 그 옷 설마 인벤토리에 들어가던 아이템이냐? 대체 무슨 용도로 쓰려고 아직도 이 옷을 가지고 있었냐?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이걸 입고 있냐, 같은 질문들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들을 꺼내놓으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동생을 괜히 다그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고 흥분했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 같아서 유진은 최대한 평온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척이었다. 그때는 동생의 얼굴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한 채로 입고 있던 옷이라 지금 같지 않았는데……. 한유현의 얼굴을 한 채로 경찰청장 제복을 입은 지금의 동생은, 그 동생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끌어와 30분 동안 찬양을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도 완벽했다.

그 모습 앞에서 한유진의 심장이 어떻게 떨리지가 않겠는가.

이성적인 좌뇌가 ‘나는 제복 같은 거에 흥분하는 취미는 없는데!!!’라고 삼백 번을 생각해도, 감성적인 우뇌가 ‘하지만 내 동생이 이렇게 멋진데 내 취향이 무슨 의미야!!!’ 라고 삼백 한 번 생각했다.

결국 심장은 우뇌에 굴복해 바들바들 떨리고, 전부 바스라지고 가루 같은 것이 한 조각쯤 남은 이성이 그래도 너무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평온한 척을 하고 있었다.

 

“전에 형이, 내 원래 얼굴로도 이거 입은 거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응, 그랬지. 그랬었지. 그래도 설마 이걸 야무지게 챙겨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제 동생이 자신의 말은 무엇 하나 허투루 듣는 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마치 갑자기 신이 들어와 저도 모르게 예언을 뱉게 된다는 무속인들처럼, 동생 앞에서는 주접과 접신이라도 된 것마냥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불쑥불쑥 내뱉게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문제 인가? 주접 한 번으로 이런 완벽한 것을 보게 된다면 그건 올바른 습관인게 아닐까.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어디선가 스치듯이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은 주접 한 번으로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루어낸 것이 아닐까?

 

“…형.”

“아? 응?”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감성에게 설득을 당하고 있던 유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생의 말에 빠르게 대답을 해줬어야 할 텐데. 너무 자기 생각에 빠져 바로 반응을 하지 못하고 멍 하니 시선을 흘리고 있었다. 이러면 아까까지 태연한 척했던게 다 무슨 소용이람.

유진은 황급히 ‘역시 내 동생 너무 잘 어울린다.’라며 진심을 담뿍 담은 칭찬을 내뱉으려 했다. 무슨 생각으로 잠들기 직전인 지금에야 이것을 챙겨 입은 것인지, 같은 천사같은 동생의 순수성을 해칠지도 모르는 질문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어?”

“형이, 아무런 말도 없어서 싫은 거라면 다시 갈아 입을…….”

“아니, 유현아 이 형이 싫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지금까지의 노력 안녕.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으려 했던 의지여 안녕. 하지만 지금 유현이가 실망한 표정을 하잖아!!

유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동생에게 바짝 다가가 살짝 풀이 죽어 있는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진지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는 단 한 톨의 거짓도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는 진지한 유진의 눈빛에 유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배시시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이 옷, 너한테 정말 잘 어울려.”

“…정말?”

“정말, 완전. 마음에 들어.”

 

눈빛만이 아니라 이번에는 고개까지 크게 한 번 끄덕였다. 끄덕이라는 효과음이 소리로 들렸다면 볼륨 50 정도로는 들렸을 정도로 아주 아주 단호한 행동이었다. 그런 형의 모습에 유현도 안심했는지, 유현의 얼굴에는 곧 말간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유현은 유진이 아주 좋아하는, 바로 그 표정으로.

 

“형이 벗겨보고 싶을 만큼?”

 

제 볼을 감싸는 유진의 오른손에 볼이 조금 더 깊이 묻히도록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뱉어내는 목소리에 유진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가늘게 떨었다. 쿵, 쿵, 쿵, 너무 크게 뛰어 이대로 가다가는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그 고동소리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너무 완벽한, 너무 아름다운, 유진의 동생은 심지어 함정을 파는 솜씨까지 완벽했다.

촉, 유진은 제 손바닥 가운데 닿은 물큰한 입술의 감촉을 느낀 순간 결국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걸 더는 버티지 못 했다. 그저 그렇게 기울어지는 제 몸을 받아 안아오는 동생의 품에 갇힌 채 아주 힘없는 목소리로 뱉은 말이 유진이 그날 밤 이성을 가지고 토해낸 마지막 문장이었다.

 

“너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라는 문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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