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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내스급

유현유진 온리전 이벤트 참가용 연성 #신혼

by 자렌Jaren 2020. 7. 4.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거 누가 한 말 아니었나? 아, 맞아. 맞아. 그랬었지. 그런 일도 있었어. 그런데 그때 왜 그런 거더라?

시간은 그랬다. 잘 지워지지 않는 딱딱한 지우개 같았다. 시간이 스쳐지나 잊힌 기억들은 이렇게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거나, 어느 부분은 지워지고 어느 부분은 지워지지 못 한 채 어설프게 흔적이 남았다.

오늘 아침, 유진의 꿈을 지배했던 기억이 딱 이러했다.

맞아,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왜 일어난 거더라?

의문은 남았고, 지우개 가루처럼 남은 찝찝함이 뇌 속에 굴러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유현아.”

“응, 형. 일어났어?”

“너 혹시 한 대여섯 살 즈음에 놀이터에서 싸웠던 거 기억 나냐?”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침 인사보다 먼저 의문을 입에 담아 버린 것이었다.

밤새 닫혀있던 눈꺼풀은 아직도 반 밖에 열리지 못 했는데. 흐린 시야와 잠겨서 거칠어진 목소리를 인식하기도 전에 물어버렸다.

 

“대여섯 살 때?”

“…응. 그때 막 네가 화나서 친구를 밀쳐가지고 걔가 넘어져서 철봉인가 정글짐인가에 부딪쳤잖아.”

 

말을 꺼내놓고 나서야 제 목 상태를 알아차렸다는 듯 몇 차례 큼큼 헛기침을 한 유진은 말을 이어나갔다.

유진도 유현도 왜 목소리가 이렇게나 갈라지는지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둘 중에 유진의 목소리가 그렇게 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의 쇄골과 목덜미, 소담히 부풀어 볼록해진 유두 근처에 붉은 흔적이 남은 것과 같은 이유라는 걸,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았다.

 

“기억 나, 철봉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었지.”

“아, 맞아. 이제 기억나네.”

 

밀쳐진 아이는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철봉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 마냥 아이는 목청을 키워 ‘엄마!!’를 외치며 울기 시작했고. 놀이터 한쪽 구석에 있는 정자에서 다른 아이 엄마들과 담소를 나누던 아이 엄마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언제나 이런 일이 생기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은 유진의 일이었기에, 아이 어머니에게 제 동생이 아아를 밀쳤다고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당연히 ‘너네 뭐 하는 애들이니.’ 라든가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라는 뾰족한 못 같은 외침이 박힐 걸 예상하며 한 발 앞서 사과를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사과를 하는 유진에게 그 아이 어머니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호쾌하게 웃어보였다. 그날도 부모님은 목적지도 알리지 않은 여행을 떠나 집에 없었기에 유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정말 죄송하다, 다시 한번 머리를 푹 숙여 사과하고 유현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떠났더랬다.

그런데 꿈에 갑자기 잊고 있던 그날의 일이 재생되었다. 동생의 자그마한 손에 묻어 있던 모래의 거칠한 촉감까지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게.

꿈에서 유진의 머리 위로 쏟아졌던 그날의 유쾌한 웃음소리도 선명히 귀에 남았다. 어머, 얘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음성은 정말 구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에서 깬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아주머니는, 표정을 제대로 숨기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의 불안을 미리 알아보고 그렇게 말해 안심시켜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고마운 일이었다.

 

“근데 네가 걔를 왜 밀친 거였지?”

 

그날의 사건과 사과는 이렇게나 뚜렷하게 떠올랐는데. 대체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건지.

그래서 물은 것이었는데, 동생은 무슨 일인지 아까 전처럼 바로 시원하게 답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그건 왜?”

“어? 아니, 오늘 꿈에서 갑자기 나오잖냐.”

 

근데 네가 왜 그랬는지 이유는 꿈에서도 나오지 않았다고. 뚝 잘려버린 기억 탓을 하는 동안 유진의 눈꺼풀은 완벽하게 초점을 되찾았다.

저를 바라보며 옆자리에 누워있던 동생의 말간 얼굴이 유진의 검은 눈동자에 쏙 빨려 들어왔다. 입맛에 맞는 요리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듯이, 유진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제 앞의 얼굴을 삼켜냈다.

유진이 자는 사이에 씻고 나온 것인지, 굽슬거리는 유현의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있었다. 그 머리카락 아래 있는 밟히지 않은 눈밭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 위에는 눈코입이 자리 잡았다. 예술가가 정성을 들여 위치를 조율하고 모양을 깎아낸 듯한 그 이목구비는 언제나 유진의 취향에 꼭 맞았다.

유진은 제 동생의 얼굴이 박물관에 걸린 그림이라면 그 앞에 소파를 놓고 세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앉아 마냥 바라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미술관의 접근금지 안내줄 뒤도 아니고,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어떻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흰 커튼이라는 체에 걸러진 곱고 부드러운 아침 햇살과 사랑하는 이의 얼굴.

그것들이 지난밤의 꿈 때문에 시작된 가벼운 호기심을 유진의 머릿속에서 밀어내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리 간절하지 않은 물음에 대한 답을 재촉하는 말은 결국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 마저 유진의 기억에서 잊히려는 순간,

 

“여보.”

“…어?”

 

뭐, 뭐야, 갑자기! 물론 엄밀히 따지면 결혼한 지 1년이나 된 배우자에게 여보라든가 당신이라든가 그런 단어를 쓰는 게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 적은 없으면서!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 눈동자를 땡그라니 뜨는 유진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잠시 바라보던 유현이 여전히 차분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부엌 커피포트에서 흘러드는 커피 향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형이랑 소꿉놀이 한다고 여보라고 불렀더니, 걔가 이상하다고 했어.”

“아… 마, 맞아. 너 어릴 때 소꿉놀이 할 때는 꼭….”

 

날 여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을 혀에 올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벌침에 따끔하게 쏘이기라도 한 듯 혀가 굳었다.

여보라는 그 단어 하나가 뭐라고, 갑자기 목줄기를 타고 긴장이 오르며 발끝이 간질거렸다. 저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꼼지락 꼼지락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자 시트에 맨다리가 살살 감겼다. 여태 아무렇지 않았던 이불 속의 알몸이 인식되었다.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이 올라와 유진이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 작은 진동이 이불 밖에 누워있던 동생에게도 전해질 거란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결혼한 여자만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나는 남자니까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해서.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시하기가 싫었나 봐. 난 형이랑 결혼해서 계속 같이 있을 거라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했지.”

 

웃는 얼굴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현의 이야기가 조근조근 이어질수록 유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만큼, 유현의 웃음도 짙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새, 유현은 유진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그 모양 좋은 코끝에 유진의 콧망울이 닿을 정도로.

 

“그런데 형이랑은 결혼 못 하는 거라고, 또 이상하다고 하잖아.”

 

그래서 더 듣기 싫어져서 밀었어.

아마 그때 유현은 아이를 찌르거나 죽였더라도 지금과 똑같이 제가 한 일을 덤덤히 말했을 터였다.

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켰든, 현재 유현의 감정을 움직이지는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이 유진을 동요시킨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욱 중요했으니.

 

“지금까진 형은 형이니까, 결혼했다고 해서 호칭을 바꿀 생각은 안 했었는데.”

 

어젯밤 유진을 지탱하고, 붙잡고, 끌어안았던 단단한 팔이 다시 유진의 허리에 감겼다. 이불을 덮은 형을 이불 째로 끌어안아 제 몸을 형에게 바짝 붙인 유현은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알아달라는 듯, 제 귀를 형을 심장 근처에 바싹 붙였다.

쿵, 쿵, 형의 갈비뼈 안쪽에서 심장이 몸을 부풀려 형의 뼈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형이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걸 그랬어.”

 

쿵, 쿵, 요란하고 묵직하고 사랑스러운 소리가 났다.

 

“여보.”

 

아까 보다 더욱 빠르게 쿵, 쿵. 그 소리를 들으며 유현은, 사랑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분명 이런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아침.”

 

또 하나, 형이 가르쳐준 사랑이 늘었다. 이 소리는 사랑이었다. 형이 오늘도 유현에게 돌려준 고백이었다.

나도, 나도 사랑해. 형의 목소리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유현은 오늘도 아침 이슬처럼 제게 내린 행복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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