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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내스급

2019년 8월 24일 유현유진 전력 [커피]

by 자렌Jaren 2019. 8. 24.

 

 

한유진이 제일 처음 입에 댄 커피는 학생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내기 위해 마셨던 캔커피였다.

시험기간에 늦게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할 때, 잠을 쫓겠다며 사 마셨던 싸구려 캔커피. 학생의 용돈으로 사 마셔도 부담이 없던 그것은 딱 그 값을 했다. 맛은 미각을 뒤덮을 만큼 자극적이고, 몇 모금이면 사라질 만큼 양도 적었으니.

그래도 유진은 씁쓸한 맛 사이에 진한 단맛이 섞인 그 커피를 싫어하지 않았다. 혀에 찐득찐득하게 남는 단맛은 싫어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다.

두 번째로 마신 커피는 공장의 휴게실에 놓여있던 스틱형 믹스 커피였다. 스틱 하나의 꽁지를 톡 뜯어내고, 안에 있던 흰 가루와 갈색 알갱이들을 종이컵 안에 쏟아 넣었다. 그 종이컵에 가득 차도록 뜨거운 물을 부은 후에 손에 들린 비어버린 스틱 봉지를 세로로 접어 종이컵 안의 물을 휘휘 휘젓는 것이다.

덩어리 진 것 없이 완전한 연갈색으로 풀어진 그것은 캔커피보다 더욱 진한 텁텁함을 혀 위에 잔뜩 얹어놓았다.

물론 요즘은 카페에서 휘핑을 얹은 달달한 커피라든지, 우유를 잔뜩 넣은 커피를 더 자주 마셨지만 유진은 여전히 커피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그 두 가지 커피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학교 매점에서 사 마셨던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캔커피와 흰 종이컵에 담겨 공장의 추위로 곱아진 손가락을 데워주었던 믹스 커피.

하지만 단순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과 좋아하는 커피는 확실히 달랐다.

텁텁하기 그지없는 그것들보다는 당연히 초콜렛 맛과 휘핑이 달달하게 섞인 것들이 더 좋다고 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이 지금과 같은 과소비를 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었다.

 

“형… 이게 다 뭐야…….”

“아, 유현아 왔어?”

 

활짝 웃는 얼굴로 동생의 귀가를 반기는 유진의 얼굴에는 조금의 구김도 없었다. 오늘 하루도 밖에서 고생한 동생을 반기는 그 표정에 대롱대롱 맺힌 것은 은하수를 흐르는 별처럼 수없이 빛나는 반가움과 기쁨뿐.

그럼에도 평소라면 유진의 환한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돌려주었을 유현의 얼굴에선 여전히 놀람이 떠나지 못했다. 깊은 우물 같은 눈동자가 제게 다가와 반가이 허리를 끌어안는 형에게 바로 향하지 못하고 여전히 형의 어깨너머 거실을 향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 놀람의 정도가 평소보다 많이 크긴 했다.

유진도 바로 자신을 마주 안아주지 않는 동생의 태도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거실을 보았다. 동생이 저보다 우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겠다는 듯 슬그머니 눈꼬리가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민한 고양이처럼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던 눈매는 제 동생 앞에서 언제나 그러하듯 살그머니 몸을 낮추었다.

 

“저거 보고 놀란 거야?”

“어… 형, 설마 저 박스 전부 커피야?”

“당연하지! 우리 유현이가 광고한 건데 형이 좀 팔아줘야 하지 않겠냐!”

 

좀이 아닌 것 같은데……. 하루에 하나씩 저것만 마셔도 이십 년은 마실 것 같은데.

너무도 뿌듯하게, 마치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 자신에게 상으로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손을 잡고 집 근처 돈까스 집에 갔을 때와 같은 형의 얼굴에, 유현은 결국 살풋 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이를 앞에 두고 뿌듯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저 얼굴은 어쩜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게 없을까.

형의 말대로라면 이 넓은 거실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갈색 상자들 안에는 자신이 광고를 찍는 내내 마시면서 속으로 욕지기를 퍼부었던 인스턴트커피가 들어있을 것이다.

코에 냄새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에 끈끈한 것이 들러붙는 듯해 싫어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형이 저를 위해 사주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근데 유현아, 네가 원래 인스턴트 커피를 좋아했던가?”

“응?”

“아니… 넌 원래 광고 같은 거 잘 안 찍잖냐. 그런데 이번에 드물게 광고를 찍었길래. 좋아하는 건가 했지.”

“형이 좋아하잖아.”

“어?”

“형이 예전에 일하러 다닐 때, 이 커피 스틱 집에 잔뜩 가져다 놓고 그랬잖아.”

 

그래서 광고가 들어왔을 때 받아들였노라고. 자신은 이런 달달한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단순히 형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광고를 찍었노라고.

그 말을 꺼내며 유현은 형의 인사에 조금 늦게 답했다.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형의 등을 끌어안으며 때늦은 미소를 띠우는 동생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진은 터지려는 억눌린 웃음을 억지로 꾹 억눌렀다. 혀를 제 입천장을 눌러 목에서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꾸역꾸역 다시 안으로 밀어 넣고는, 오히려 제 동생이 마냥 귀엽다는 양 가슴에 이마를 부볐다.

그때는 일이 엄청 힘들어 그냥 회사 물건을 뭐 하나라도 더 축내고 싶어 그런 것이라고. 특별히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 말은 당연히 동생에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서로가 아주 소중하기에 숨겨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었으니.

지금은 그저 훅 끼쳐오는 동생의 체향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득 들이마시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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