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운 꽃의 이름은
한유현이 알고 있는 꽃의 이름은 결국 모두 한유진이 알려준 것들이었다. 지나가던 길의 담장 너머로 드리워진 아카시아 꽃도. 학교 가는 길에 피어있는 철쭉과 개나리도. 크고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목련도. 모두 한유진이 알려준 것들이었다.
애초에 어린이용 낱말 공부 책도 한유진이 붙어 앉아 읽어준 것이었으니. 가지, 나비, 다람쥐 따위와 함께 꽃의 이름들을 배웠다고 생각하며 정말로 한유현에게 꽃의 이름을 가르친 것은 한유진이 맞았음.
사실 꽃뿐만 아니라 한유현에게는 세상 모든 단어가 한유진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꽃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한유진을 떠오르게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카네이션이 아닌 장미였다. 한유진이 자기가 좋아한다고 말한 꽃이 장미였기 때문이었음.
‘아빠가 엄마한테 고백할 때 선물한 꽃이 장미였대. 그런데 나중에 짝이 되고나서 몸에 새겨진 꽃도 장미였다더라.’
마치 운명적 어떤 순간을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 형의 들뜬 얼굴을 보면 유현도 어렴풋이. 어머니의 뒷목에 덩굴에 감겨 자라난 붉은 장미 몇 송이가 새겨져 있던 걸 기억해 내곤 했음. 몇 송이가 피어나는지는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몇 송이가 새겨져 있었는지까지 관심을 두지 않아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만 그 이야기를 해줄 때의 형의 얼굴이 조금 기대감에 부풀었다는 것과 즐거워 보였다는 것만은 또렷이 기억했음. 형과 함께 있는 순간은 그날의 날씨가 어떠했는지까지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현은 제 형이 이런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운명론적 무언가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것과 장미라는 꽃에 퍽 호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게 되었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유현의 지난 3년을 버티게 해준 꽃이 장미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매번 제가 사러 나갈 수 없으니, 유현이 혼자 지낼 때 항상 일정 시간이 되면 장미꽃이 배달되어 왔다. 언젠가, 이 꽃을 들고 형에게 사과를 하러 가야지. 지금까지 미안했노라고.
비록 사실이라고 해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형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형의 상처 앞에 제 변명을 내놓을 정도로 유현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무릎을 꿇고 비는 용서를 구하는 장면만을 생각했다. 그 순간에 장미가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주지 않을까. 그저 그뿐이었고. 그렇기에 유현은 언제나 수요일에 배달되는 화사한 장미꽃 한 다발을 앞에 두고 형을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유현은 제가 장미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들이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첫 뒤틀림은 유현이 처음으로 눈에 거슬리는 헌터를 살해한 날이었다. 그는 MKC 길드에서 해연에 심은 스파이 중 하나였다. 해연이 거래하려는 던전들을 교묘하게 MKC측에서 먼저 사들인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보를 빼돌리는 이가 인사팀에 숨어들어와 있었다.
빨리 자리를 잡아 해연을 튼튼하게 만들면, 한시라도 빨리 형을 일부러 외면하는 이 생활을 끝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자꾸만 거세어지는 주변의 방해에 초조함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끌고 가.’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던전으로 끌고 가 그곳에서 시체마저 사라지게 하라고. 스파이의 실종은 MKC측에 보내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날 유현은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도 장미 꽃잎을 만져보지 못했다. 첫 살인을 후회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살인을 지시한 자신을 형이 어떻게 생각할까 답을 알 수 없었기에 잠시 주저가 되었다.
하지만 더 빨리 형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한 거라고. 그런 이유라며 제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것도 다만 처음의 몇 번 뿐이었지만.
유현은 곧 자신이 형을 제 죄의 면죄부처럼 이용하는 것이 아닌 가 고민하게 되었다.
형을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과연 형이 용서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죄들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이후로 장미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없게 되었다. 장미의 붉은 빛이 제가 만든 피들을 머금은 것만 같았다. 배달마저 끊지는 못했지만, 그 장미를 전처럼 형을 떠올리며 쳐다볼 수 없었다.
“장미는 일부러 매주 배달시키는 거야?”
하지만 그 장미가 다시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내 동생, 한유현. 사랑한다.’ 그 말과 함께 제 곁으로 돌아온 형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유현의 집에 꼬박꼬박 배달되는 장미의 존재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유현은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꽃다발이 형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제법 침착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집이 너무 허전한 것 같아서.’ 일단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형은 다행히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향을 한번 머금는 것으로 더는 궁금한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형은 아직도 장미가 좋아?”
특별히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유현이 과거의 어느 날에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아직 기억한다는 것이 퍽 좋았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유현에게 다가가 제 동생을 품에 끌어안았다.
“당연히 아직 좋은데. 이제 꽃 배달은 더 안 시켜도 되겠더라.”
“왜?”
돈 낭비라고 생각하나? 그러고 보니 제 형이 아직도 10억 정도는 통장에 퍽퍽 꽂아 넣어주는 동생을 두고도 제법 서민적인 경제관을 고수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마트에서 500원 차이나는 두부를 어느 걸 살까 고민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배달되는 호화 장미꽃다발이 돈 낭비로 느껴질 만도 그럼 당장 꽃다발을 중지하라고 전화를 해야 겠다 생각했을 때였다.
“너 아직 네 등 못 봤냐?”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제가 끌어안은 품에 웃음을 큭큭 토해놓는 형의 모습에 유현은 형을 마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형을 살짝 제 품에서 떨궈놓았다. 확실히. 형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깜짝 선물을 숨겨 놓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못 봤는데?”
사실 제 등을 일부러 볼 일이 뭐가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을 때도 앞이라도 보면 다행인 것을. 특히 자신처럼 오늘 일정에 맞춰 해연 코디 팀에서 맞춰서 미리 집으로 올려 보낸 옷을 알아서 챙겨 입고 메이크업을 받는 사람은 더더욱 등을 볼 일이 없기도 했다.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꾸하는 유현의 말에 유진은 ‘그럼 아직 이걸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지?’라고 즐겁게 웃어버렸다. 이걸 말해줘 말아? 마치 그런 고민을 하듯 둘러 안은 유현의 등을 슥 쓸어내리던 유진의 손이 유현의 척추에 닿았다.
오돌토돌한 그 길을 걷듯, 슬쩍 세운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야릇한 움직임에 유현도 슬쩍 제 형을 다시 품으로 당겨 안고 허리춤을 쓸어 내렸다. 제 손길을 동생이 어떻게 받아들었는지 이해했다는 듯, 유진이 슬그머니 허리춤을 조금 떨어트려 유현의 손이 상의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도왔다.
이윽고 유현은 유진이 가볍게 걸치고 있던 헐렁한 티셔츠를 벗겨냈다. 하지만 그 순간 유현은 더는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듯 한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형의 쇄골에서부터 꽃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짝 도드라진 그 뼈 위에 가시가 돋은 넝쿨이 얽히고, 넝쿨에 걸린 채 아래쪽 심장 방향을 향해 활짝 피어난 장미꽃들이 왼쪽 가슴팍 위에까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심장을 꽃으로 감싸려는 것처럼.
“오늘 아침에 보니까 생겼더라.”
유현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기에 유진도 더는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너는 여기. 피었어.”
유진의 손이 쓸어 내려갔던 척추 위. 척추를 감싸듯 얽힌 가시 넝쿨 위에 점점이 붉은 장미가 피어있다고 했다. 유현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한유진이라는 운명에 의해 바로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장미가 그곳을 피어날 장소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미 형은 옷을 챙겨 입고 제 아침을 차려주기 위해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탓에 보지 못했었는데. 먼저 눈을 뜬 형은 자신의 가슴 위에 꽃뿐만 아니라 유현의 등 뒤에 새겨진 것까지 미리 보았던 모양이었다.
“왜 아침에 말 안 했어?”
“그냥, 어차피 알게 될 거기도 했고……”
이상하게 말하기 쑥스럽더라고.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거…… 이거 실제로 말하려니 되게 부……”
그래, 말하지 않아도 되지. 형과 내가,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운명적 무언가 였다는 말 같은 거. 그 사실은 이미 눈에 보이는 형태로 너무 선명하게 인정받아 버렸으니까.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다급하게 유진의 입술을 삼키는 소리만이 문이 닫힌 방 안을 가득 울릴 뿐이었다.
* 운명의 상대와 맺어지면 같은 종류의 꽃이 몸에 문신으로 새겨진다는 설정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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