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음 주의ㅠ
그 짧지만 강렬한 소동은 인터넷에 올라온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이거 한유진 헌터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익명 게시판의 글 안에 들어 있는 한 장의 사진. 그 사진으로 찍힌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댓글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좀 지났는지 살짝 노르스름하게 변한 종이 속에 담긴 검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한 사람의 모습. 그린 사람의 내공이 느껴지는 그림은 인물의 특징을 제법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 사람이 한유진 헌터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으로 그려진 각도와 최대한 비슷한 사진을 구해와 그림과 나란히 붙여 올리며 ‘맞네, 본인인가 보네.’라고 확신을 더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등받이가 없는 낮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듯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그림 속 인물은 편안하게 팔을 내리고 다리를 꼬고 있었다. 표정도 편안하게 풀려있어, 눈꼬리와 입매가 느슨하게 호선을 그린 것이 보기 좋았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깥에서 불어오는 연한 봄 향기가 코를 스미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인터넷이 그리 들썩인 건, 단순히 그림이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그림 파시죠. 가격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다른 말은 없이 덜렁 용건과 전화 연락처만 적힌 쪽지. 사실은 글 작성자가 연락처만 지운 채 인증해버린 그것이 인터넷을 들끓게 한 더욱 결정적인 계기였다.
글 작성자가 실수로 지우지 않은 쪽지를 보낸 이의 아이디가 HU**** 라는 걸, 발견한 이가 있을 줄은…… 쪽지를 보낸 이도 쪽지를 받은 이도,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
그림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학원 선생님 중 한 사람이 참고용으로 그려둔 오래 된 크로키 북을 넘겨보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사진을 찍어 올렸던 것이었다. 한유현이 비밀리에 글 작성자를 찾아갔을 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어서, 유현은 어렵지 않게 학생이 다닌다는 학원을 찾아가 그림을 그린 본인과의 협상 끝에 크로키 북에 실린 ‘모든’ 한유진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학생이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것은 개중 특히 잘 그린 두세 점이었지만, 실제로 크로키 북에 있던 그림들 중 한유진이 그려진 것은 약 십여 장에 달했다.
‘크로키 모델 알바를 꽤 오래 해줬죠.’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풀어 놓은 그 학원 선생님의 과거 속에는 유현의 형 ‘한유진’이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는 다른 일을 하고, 미술 학원의 야간 수업에서 크로키 모델을 해주는 알바를 해주러 왔다고 했다. 직장인이나, 늦은 시간 밖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밤늦게 진행되는 클래스라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는데, 유진 학생이 꽤 오랫동안 알바를 해줘서 정말 고마웠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수더분한 인상의 미술학원 강사에게서는 호의가 느껴졌다. 열심히 사는 어린 아이를 대견해 하는 어른 특유의 푸근함이 녹아든 그 얼굴에 유현은 조금 딱딱하게 입매를 굳혔다가, 돈은 필요 없다는 그녀의 손에 억지로 준비한 봉투를 쥐어주고 나왔다.
유현이 미련 없이 좁고 어두운 미술학원 복도를 빠져나온 후, 불이 켜져 있어도 묘하게 어두운 복도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유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유현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까.
유현은 오랜만에 형의 집이 아니라 제가 혼자 살던 집으로 돌아와 텅 비어있던 거실 테이블에 제가 사온 그림을 하나하나 늘어두었다. 정면, 측면, 뒷모습. 모델 알바였다더니, 꽤나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진 제 형의 모습이 묘하게 생소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로 쭉 뻗은 가는 목선도, 얇은 몸을 감싸는 헐렁한 반팔 티셔츠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팔도. 살짝 발목이 드러난 청바지나 뼈가 도드라진 손목까지. 어느 것 하나 제 손으로 직접 만져보지 못한 곳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림 속의 유진은 유현에게 무척 낯설었다.
“유현아, 안에 있어?”
“…형?”
“오늘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왜 이쪽으로 왔나 해서……”
한참 이어지던 감상은 의외의 방해꾼으로 인해 급하게 막을 내려야했다. 유현은 가만히 바라보던 그림에서 눈을 떼고 현관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들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벅저벅, 짧지 않은 거리를 지나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초에 갑작스러운 침입자가 누구인지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긴 했다. 해연 길드장의 집에 이렇게 마음대로 드나들 사람이야 한 사람 밖에 없지 않은가. 미리 방문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길드장의 집으로 이어지는 지정 미니 포털을 원할 때 마음대로 통과하도록 허락한 상대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것을.
“방해한 건 아니지?”
역시나 생각했던 상대의 조심스러운 등장에 유현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끄덕임에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앉은 유현에게 다가오는 걸음에 주저함이 사라졌다. 하지만 빠르게 유현을 향해 걸어오던 유진의 걸음이 잠시 멈춘 것은 소파 앞 테이블 옆을 지날 때였다.
“…너 이건 어디서 났냐?”
“샀어.”
“사? 이걸?”
대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묻는 궁금증 어린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면 형은 싫어하겠지. 그렇기에 유현은 제 마음은 입 안에 잘 눌러둔 채 그저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꼬리로 지금의 즐거운 기분을 드러내며 제 형을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지라 유현은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유진의 손목을 쥘 수 있었다. 그렇게 쥔 것을 제 쪽으로 가볍게 당기자, 유진의 몸이 거부감 없이 유현을 향해 다가왔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소파의 앉은 유현의 허벅지 위에 털썩 앉혀진 유진은 눈 깜박할 사이에 유현의 팔 안에 갇혀야 했다.
“응. 우연히 발견해서 내가 다 사겠다고 했어.”
“누가 이런 걸 다 팔았냐……”
헌터가 되니까 별게 다 팔리네. 무엇이 그리 쑥스러운 걸까. 고개를 살짝 돌려 제가 그려진 그림을 흘낏 바라보던 시선이 금세 그림에서 떼어내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이 썩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조금 붉어진 얼굴이 또 내심 귀여워, 유현은 팔을 뻗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 한 장을 집어 올렸다. 가장 처음, 인터넷에 올라왔던 그 그림을.
“이게 형이 고등학생 때인가?”
“아마 맞을 걸? 공장에 들어가기 전에 한창 이것저것 알바 하던 때 같은데……”
아, 그 말에 유현은 문득 제가 느끼던 불유쾌한 낯설음의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 그림은, 자신이 형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보던 시간의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생계를 잇기 위해 일을 시작하기 시작했던 그때다. 항상 학교가 끝나면 제 옆을 지켜주던 형이 어느 순간부터 집 안에서 모습이 지워진 사람처럼 사라졌던 그 시절이다.
학교를 그만 둔 후, 부랴부랴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일을 하던 시절의 유진은 거의 집에 없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또 오후부터 밤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시절은. 유현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 얼굴을 본 형이 잠들기 전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으니까.
제 형의 모습은 거의 다 기억에 있지만, 그 시절의 형만은 유현의 기억에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현이 직접 보지 못했던 그 시절의 편린이 노오랗게 변해버린 종이 안에 박제되어 있었다.
유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림들을 다시 훑었다. 확실히 그림으로 그려진 형은 지금보다 조금 더 영글지 못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굴곡을 그리는 얼굴은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해 앳된 티가 났다. 목에서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선은 불퉁한 근육 하나 없이 둥글게 떨어져, 그림의 모델을 소년이라 느끼게 했다.
소년, 어쩐지 유현은 제가 방금 떠올린 그 단어에 울컥 슬픔이 치미는 걸 느꼈다. 저를 기르느라 제 형이 잃었던 시절의 이름은 날 것으로 삼키기에는 너무나 아팠다.
“처음에는 좀 쑥스러웠는데…… 오랜만에 보니 재미있네.”
“그래?”
“응. 오랜만에 그때 생각도 나고.”
유현이 한쪽 모서리를 잡고 있던 그림의 반대쪽을 슬쩍 쥔 유진이 그림을 가져갔다. 브러시로 톡톡 두드려 바른 듯 옅은 붉은 빛이 퍼져있던 목덜미도 어느새 본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어린 제 모습을 훑는 검은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힌 감정처럼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타박, 타박, 그 차분한 감정을 닮은 진중한 걸음으로 제 과거를 더듬어 보고 있는 듯했다.
“……형은, 이때 무슨 생각했어?”
궁금증이 참지 못하고 목 너머로 넘어왔다. 제가 아프게만 느꼈던 과거를 차분히 복기하는 모습에 불쑥 궁금증이 치밀었다. 밤낮으로 집에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돌이켜 볼 수 있느냐고. 미간에 주름 하나, 목소리에 불쾌감 한줌 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즐거운 듯 떠올릴 수 있느냐고.
제가 짐작조차 못하는 형의 마음이 있다는 게 싫은 탓에, 유현의 질문은 다소 조급하게 튀어나왔다.
“이때?”
톡, 그림을 쥐지 않았던 다른 손의 검지가 그림이 그려진 종이 위를 가볍게 건드렸다. 팔랑, 가벼운 움직임에도 큰 공격을 받은 것처럼 종이가 한번 파들 떨렸다. 그 탓에 부드러운 웃음을 띤 그림 속 유진의 입매가 살짝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여러 가지?”
어느 어렴풋한 기억들은 타인의 물음으로 인해 더욱 구체화되기도 한다. 지금, 유진이 떠올린 과거의 기억이 그러하듯이. 유현의 이상할 정도로 조급해 보이는 질문에 자극을 받았는지 뇌가 꾸역꾸역 그 시절의 기억을 밀어냈다. 유진의 입가에 다시금 그때와 닮은 미소가 걸려들었다.
유진은 웃으며 제가 들고 있던 그림을 테이블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대신 몸을 조금 돌려 제 동생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하면 이제는 저보다 더욱 넓어진 동생의 품에 몸을 묻을 수 있었다.
“유현이가 밥은 먹었을까, 지금쯤 숙제는 다 해놨을까. 오늘은 학교에서 별 일이 없었을까. 씻고 잘 시간인데, 내 걱정을 하다가 못자고 있지는 않을까……”
느릿하게 흐르는 봄 향기를 닮은 그 목소리가. 도닥, 도닥, 마치 자장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것처럼 느리게 움직여 유현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하게 가슴팍에 퍼지는 숨결이.
그 모든 것들이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서 순간 유현은 말을 잃었다. 제가 상처를 내며 삼켰던 형의 소년 시절은 결국 시리고 아프기만 한 아니었다. 그는, 지금 제가 있어 이렇게 어여쁘게 웃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동생이 있어서, 피곤한 몸으로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비껴보며 떠올릴 한 사람이 있어 행복했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 그때는.”
“지금도 그렇고?”
“당연히 지금도 그렇지. 어때, 우리 유현이 오늘 저녁은 챙겨 먹었냐?”
슬쩍 웃음 띤 질문을 흘려오는 유현에게 맞장구를 치듯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꽃봉오리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일시에 꽃망울을 터트린 것 같은 미소가 터졌다. 즐거움을 조금도 가리지 않는 얼굴로 던진 물음이 동생의 장난기에 충실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지금부터 형으로 먹게 해달라고 하면?”
하지만 동생의 장난은 유진이 생각한 것과는 수위가 다른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감정이 깊어진 눈매에 장난기 외의 다른 것이 스미기 시작한 걸 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유현의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애정이 잔잔하던 감정에 동심원을 그렸다. 이제는 그때처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는 현실이 유진을 떠밀었다. 기꺼이 이 장난에 어울려주라고. 동생의, 연인의 허기를 삼켜주라고.
어느새 맞닿은 입술로 대답을 대신하며 유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아래 그림에 박제되던 순간의 밤하늘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날도, 오늘도, 결국 눈꺼풀 아래 그려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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