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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쿠로코의 농구

2017년 5월 13일 청흑전력 [처음]

by 자렌Jaren 2017. 5. 13.

[처음]

 

처음에 만난 건 화려하지 않은 작디 작은 소극장의 무대 위. 밝기가 약한 조명은 배우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지만, 그럼에도 그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조금도 죽이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발성과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움직임.

대체 누구에게 사사 받은 걸까? 그의 연기를 본다면 제대로 된 연기 학원에 다녔다거나, 스승이 있을 것이라는 쿠로코의 예상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현실은 꽤나 유쾌하게 쿠로코의 예상을 비웃었다.

 

? 배워본 적 없는데?’

 

연극이 끝난 후, 황급히 무대 뒤의 출연자 대기실을 찾아가 그를 마주한 쿠로코가 쏟아낸 질문에 그는 표정 가득 의문을 담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연기를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심지어 이번 무대에 선 것도 소꿉친구의 징징거림에 못 이겨 펑크 낸 조연의 자리를 잠시 메꿔준 것뿐이라고. 그렇게 쿠로코로서는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말을 뱉은 그는 그대로 쿠로코를 두고 돌아서 공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연기, 제대로 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그런 그의 오른쪽 손목을 황급히 잡아 떠나려는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도저히 이대로는 포기할 수 없어서. 오는 비를 피해서 어쩌다가 들어간 작은 소극장. 큰 기대 없이 표를 끊었던 작은 극단의 단막극. 그 안에서 발견해낸 원석 같은 존재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강인한 근육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손목을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다.

무슨 운동이라도 한 걸까? 막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의 흥분으로 데워진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의 손목은 무척이나 두터웠다. 손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인 쿠로코가 한 손으로는 온전히 감아 쥘 수 없을 만큼. 그렇기에 애써 힘을 주어도 제대로 그를 잡아 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대형견 등 위에 올라탄 고양이가 대형견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꼴이랄까. 그대로 대형견이 움츠렸던 몸을 일으키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딱 그 정도의 방해물. 하지만 그 대형견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제 손목을 꼭 쥔 흰 손을 끝내 떨쳐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흥미롭다는 듯 빤히 내려다보았더랬다.

 

그것이 벌써 언제 적의 이야기인지.

 

수고했어.”

 

오랫동안 준비했던 대형 공연의 첫 번째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쿠로코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무대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농구하는 장면을 재현해야하는 역인만큼 체력의 소모가 심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역이었고, 맡고 싶었던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때보다 더욱 잘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드디어, 그와 처음으로 같은 무대에 선 공연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조금의 실수도 없이 해내고 싶었다.

 

아오미네 군도 수고했습니다.”

 

아오미네는 주인공이 아닌 중요한 준주연 역을 맡았기에 주인공역을 맡은 쿠로코보다 먼저 인사를 마치고 내려갔었다. 하지만 한 발 앞서 대기실로 돌아간 다른 배우들과는 다르게, 그는 쿠로코가 마지막으로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내려올 때까지 무대와 연결 된 통로에서 쿠로코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간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건네는 생수병을 받아들어 크게 몇 모금 미신 뒤, 입을 뗐다. 바짝 말랐던 입술에 다시 물기가 돌고, 거칠었던 호흡이 안정이 되는 동안 아오미네는 그저 쿠로코가 숨을 돌리기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무대와 대기실을 연결하는 복도의 한쪽 구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스탭들은 관객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간 무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같은 무대의 배우들도 각자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가 무대 위의 가 아닌 무대 밖의 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데 여념이 없을 시간. 모두가 정신이 없는 그 시간에 두 사람만이 또 다른 무대에 선 양 고요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같은 무대에 서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아아, 그러게.”

 

처음에는 그 정도의 재능이라면 금방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는 위치까지. 대체 삶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좀처럼 모를 일이었다. 아마, 제가 우연히 발견한 이의 반짝임에 눈이 멀어 현실을 잊었던 것이겠지. 그 정도로 무대 위의 그는 제 취향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날, 그 순간 그에게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던 것을 쿠로코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역시 큰 무대는 다른 것 같긴 해.”

큰 무대는 처음일 텐데 떨지도 않고 잘했습니다. 아오미네군.”

그래?”


칭찬이 기쁜 걸까. 샐죽 올라가는 입꼬리와 곱게 접히는 치켜뜬 눈매가 귀여웠다. 가벼운 장난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그래 보이는 것이리라.

그날 그렇게 무작정 권유를 하고, 그대로 그를 끌고 기획사 사장실로 데려갔다. 오디션을 보게하고 정식으로 회사에 집어넣고.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게 트레이닝으로 원석을 갈고 갈아 점점 더 보석으로 만들었다. 오디션을 통해 처음으로 정식으로 일을 따냈을 때는 쿠로코가 더 기뻐하며 크게 한턱 쏘겠다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 약속을 했던 것도 첫 정식 일을 축하하며 가진 둘만의 술자리에서였다. 언젠가, 꼭 같은 무대에 서자고. 그렇게 약속을 했었다. 인기 가도를 달리는 실력파 배우인 쿠로코가 이제 막 첫 일을 받은 초짜 신인 배우에게. 약속을 가장한 커다란 숙제를 턱하니 안겨줘 버렸다. 그가 이대로 놓치지 말고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와 주길 진심으로 바랐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라면 부담감을 느꼈을 그 제안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쿠로코가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방 따라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약속이 지켜진 것이 오늘, 첫 만남으로부터 이 날이 오기까지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날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처럼 상은 없어?”

또 크게 한턱 쏘는 걸로 할까요?”

아니, 그건 별로야.”

뭔가 갖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명색이 쿠로코가 선배였기에, 남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반말이었지만. 동갑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쿠로코는 그와 같은 이미지의 사람에게는 반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반말을 쓰는 것을 더 기꺼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낼 수 없는 중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를 향해 장난스러운 말을 건넬 때면 심장이 두근, 하고 처음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 있던 그를 본 날처럼 뛰곤 할 정도였다.

 

갖고 싶은 건 아니고.”

그럼?”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두근, 다시 한 번 심장이 요동쳤다. 사실 그를 발견한 후로 지금까지 무대에서는 알 수 없었던 무대 밖의 아오미네 다이키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그 시간 동안 이런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너무도 자신 취향의 연기를 하는 그에 대한 호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쿠로코는 알아챘다. 자신의 심장이, 감각이, 시선이 무대 위의 그가 아니라 무대 밖의 그를 향해서도 뛰고 있음을.

마치, 지금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좋아했어.”

아오미네군?”

 

그날, TV속에서만 무대 위에서만 바라보던 그 사람이 제 앞에 찾아온 첫날. 그날 이후로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날들이 이어졌다고 생각했다면 너는 그걸 과연 믿어줄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제 앞에서 멈춰버린 쿠로코의 커다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오미네는 성큼 둘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이 거리, 그와 자신이 서 있는 스테이지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나 노력한거라고 하면 그는 믿어줄까. 단순히 무대 위의 스타를 향한 동경이었던 감정이 어느새 그와 함께하는 날들이 쌓이는 동안 천천히 그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너는 어떤 말을 할까.

 

첫 연습도, 첫 데뷔도, 첫 대형 연극도 전부 테츠가 같이 해줬지.”

 

그러니까, 책임지고 첫 스캔들까지 같이 해줘야지? 안 그래?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아오미네는 그가 제 이런 목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로 향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저 그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라가면 말하겠노라 다짐했기에, 그의 말을 알아채고도 지금까지 아끼고 아껴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아오미네는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바뀌어버린 자신의 인생의 첫 연인을 손에 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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