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X
해연-도담 할로윈 합동 파티는, 도담과 해연의 끈끈한 사이를 외부에 드러내는데 진심인 석시명과 서경훈의 합작품이었다.
사실 유진은 할로윈에 파티를 한다는 것도, 더더군다나 변장을 한다는 것도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지만. [도담-해연 합동 할로윈 파티 개최해 눈길…] 같은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기사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두 사람의 기세에 밀려 결국 허락을 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이 으레 그렇듯이, 결정권자들이 할 일은 별로 없는 법이었다.
윗사람들이 행사를 하기로 했으면, 준비와 진행은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는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나중에 보고만 받으면서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말도 안 되는 수정 요청을 하는 수장들이 있는 곳들도 널려 있었지만. 적어도 해연과 도담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석시명과 서경훈이 오히려 앞장서서 일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유현과 한유진이 결코 그런 식으로 일에 딴지를 놓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실제로 이번 행사도 그렇게 진행 되었다. 유진과 유현은 가끔 올라오는 진행 보고를 들으면서 종종 궁금한 부분을 묻기는 했지만, 진행 상황에 이래라 저래라 입을 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 어쩌면 그래도 조금은 입을 댔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저 답지 않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하아…….”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런 분장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장팀이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다는 복장을 입고 얼굴에 화장을 받은 뒤, 가발까지 폭 쓰니 우습지만 거울을 보는 순간 ‘이게 정말 나?’ 같은 무슨 만화 대사 같은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더랬다. 그 정도로 유진의 분장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 이 분장을 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는, 무조건 못 한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경훈의 설명을 들은 후에는 뒤로 뺄 수도 없게 되었다.
해연과 도담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해연 길드장과 도담 사육소장에게 가장 어울리는 분장이 뭔지 물어보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 투표에서 당당하게 1등을 거머쥔 캐릭터라고 했다. 직원들이 투표로 대표들의 복장을 선정하고, 대표들이 그 의견을 받아들여 분장을 하고 나오는 것이 이 할로윈 파티의 하이라이트로 예정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거절을 할까?
결국 직원들의 즐거움을 위해 한 몸 바치는 심정으로 분장을 받을 수밖에.
그렇게 흡사 조별과제 발표를 하러 나가는 내향인 같은 모습으로 분장을 받으러 끌려갔던 유진은, 제 분장이 끝나자마자 유현이 있다는 옆방으로 왔다. 마지막까지 길드장님과 사육소장님의 모습을 숨겨야 한다며 두 사람이 분장을 받은 대기실이 있는 층에는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나마 안심하며 복도를 걸어 유현이 있는 대기실로 온 유진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동생을 불렀다.
“유현아.”
“형?”
“응, 너도 끝났다고 들어서.”
사실 그냥 대기실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다. 그들의 차례가 오면 함께 대기실에서 나와 만나서, 파티장으로 이동하기로 했으니. 하지만 유현이 무엇으로 분장했는지 유진에게도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유진은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동생에게 제 분장한 꼴을 보여야 한다는 민망함은 잠시고, 호기심을 풀었다는 후련함을 길 테니까.
유진은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지. 괜히 문고리를 돌리는 걸 주저하며 멈춰서 있던 그 순간이었다.
“어?”
예고도 없이 문이 안쪽으로 당겨지면 열리는 통에 유진은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 문을 당겨 연 사람이 S급인 유현이었기에 앞으로 꼬꾸라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현은 제 쪽으로 갑자기 기울어진 형의 몸을 여유롭게 받쳐 제 품에 안정적으로 넣고는, 빙글 몸을 돌리며 열었던 문까지 닫아 잠갔다.
누가 보면 유진이 실수로 넘어질 뻔한 것이 아니라, 유현과 약속하고 앞으로 고꾸라진 것처럼 보일 지경으로 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동작의 자연스러움보다, 유진은 제 몸이 빙글 도는 동안 펄럭이며 부풀어 올랐다가 동생에게 완전히 기대안기며 몸이 멈추는 순간 사르르 가라앉은 치마를 느끼며 지독하게 낯선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한번 자신이 치마를 그것도 길게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어쩐지 유현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부끄러워졌다.
“형.”
하지만 그 부름이, 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나긋한 동생의 목소리가 유진의 고개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가깝게 몸을 붙인 형제의 시선이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이거 설마 뱀파이어냐?”
“응. 그렇다고 하던데.”
원래도 흰 편인 얼굴이 핏기 없는 느낌을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더욱 희어보이게 칠해져 있었다. 눈 밑의 음영이 조금 더 짙어 보이게 칠을 하고, 입술을 평소보다 붉어 보였다. 심지어 벌린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뾰족하니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복장이 딱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뱀파이어의 전형적인 의상의 그것이었다.
검고 긴 망토와 소매가 풍성한 흰 블라우스. 그 와중에 셔츠의 목덜미는 살짝 풀어헤쳐 넥타이로 꽉 조인 정장을 입었을 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매력까지 폴폴 풍겨왔다.
“형은… 이거, 그… 공주였지?”
“백설공주.”
“응, 맞아. 형이 읽어줬었지.”
검은 단발머리에, 풍성한 소매와 긴 드레스. 미국의 모 애니메이션 사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이미지의 옷을 그대로 차려입은 유진은 제 동생이 말하는 순간 아까 전까지 계속해서 하고 있던 생각이 다시 불쑥 솟아나 자신도 모르게 불만을 툴툴 내뱉었다.
“아니, 백설공주가 말이 되냐. 마수들 돌보는 걸 보고 생각난다고 많이 뽑았다는데. 동물이랑 같이 있는 캐릭터가 백설공주 하나도 아니고. 차라리 정글북 같은 게 나았겠어.”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건 또 다 찢어진 정글 팬티 하나만 입어야 하는 거잖아.
됐다. 망했어. 어떻게 해도 솟아날 구멍이 없나보다.
“형은 지금도 멋있어.”
아, 어차피 모글리 팬티 한 장만 입고 있었어도 멋있다고 해줬을 사람이 있지.
유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유현이 그 말을 나지막이 토해냈다. 그 낮지만 단호한, 정말 진심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표정과 목소리에 어쩐지 그냥 모든 것이 우스워져서 유진은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정말 끔찍하게 힘든 일도 아니고, 격렬하게 싫어할 정도로 대단할 일도 아니다. 여장 같은 건. 그저 평화로운 시대에 파티에 한몫 하는 광대가 되는 일도 그리 싫은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제가 어떤 모습을 해도 받아들이고, 멋지다고 해줄 사람도 옆에 있는데. 뭐, 아무렴 어떨까. 그래 까짓 거 사람들 앞에 화끈하게 한 번 놀림감이 되어주고 끝내면 되지!
“형이 나가기 싫으면 나가지 말까?”
끝내면… 되는데…….
갑자기 유혹이나 다름없는 말이 유진에게 던져졌다. 심지어 그 말을 한 것은 유진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은 유현이었다. 오늘 따라 더욱 유혹적인 분장을 한, 뱀파이어 동생 말이다.
“야, 그래도 대표들이 얼굴은 내밀어야….”
“대표니까 멋대로도 할 수 있는 거지.”
“그, 그래도…….”
나가야 한다는 이성이 아직 살아 숨쉬고 있어서. 그래서 유진은 냉큼 그러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해연과 도담의 합동 파티고, 대표들이 앞에 나서는 자리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순간을 위해서 분장까지 했고. 그리고. 또 그리고… 아무튼 자신이 여기서 제 관자놀이에 살그머니 입술을 대어오는 동생의 유혹을 떨쳐내야만 하는 이유는 많았다. 정말 넘치도록 충분했는데…….
“형….”
살짝, 분장을 위해 달아놓은 게 분명한 뾰족한 송곳니가 유진의 귓불을 아주 살짝 물었다. 그 도톰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바늘에 찔리듯 이에 눌렸다가 입술에 물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살점을 쫍 빨았다. 붉은 입술 화장이 유진의 귓불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유현은 어쩐지 그것이 마음에 들어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귓불부터 시작해 형의 목덜미로 입술을 옮겨나갔다. 긴장으로 힘이 바짝 들어간 목덜미에 점점이 남는 입술의 붉은 흔적이 탐스러웠다.
“그, 유…현아….”
“…나가고 싶어?”
아, 젠장.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취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한다고 하던데. 정말이지, 딱 그 꼴이었다. 차라리 유현이 ‘형, 나가지 말자.’라고 제 마음을 이야기 했다면 유진은 나름 형답게 이성을 챙기며 동생을 달래려 들었을지도 몰랐다. 형의 책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유현이 물은 것처럼, 형은 어때? 형은 어떻게 하고 싶어? 라고 유진의 진심을 묻는다면 유진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진심은 빤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동생에게 어려서부터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니까. 그런 자신이 지금 동생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아니….”
“…나랑 있을 거지?”
“응… 읏.”
어느새, 형의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가볍게 형의 목을 물었다. 정말로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빨 것처럼, 목덜미 피부위에 송곳니의 감촉이 콕콕 닿아 유진은 그것이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제 등줄기를 따라 퍼지는 전율에 잠시 몸을 떨었다.
제 품에서 바르르 떨리는 몸을 부둥켜안으며 유현은 유진이 보지 못하는 웃음을 맺었다. 입술을 부드럽게 목덜미에 부비고, 제가 가볍게 물었던 곳을 혀로 핥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씬 형의 살내음이 제 안으로 스며들었다. 흥분으로 열이 오르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는 체향이 유현을 웃게 했다. 형이,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꺼워 유현은 그대로 한 손을 뻗어 형이 입고 있는 옷 등에 있는 지퍼를 아래로 주욱 내렸다. 자연히 주르륵 흘러내린 옷을 따라 드러나는 희고 둥근 어깨에 유현의 입술이 닿았다.
“유현이랑 놀아줘, 형.”
응, 으응… 이제 점점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호해져가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현은 그대로 유진을 들어 안았다. 길드원들이 신경 쓴다고 대기실에 놓아둔 소파가 푹신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등에 폭신한 소파의 촉감이 닿는 순간 유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치마라는 건, 정말로 아래로 손이 파고들이 쉬운 옷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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