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X
갑자기 사람들이 색을 빼앗긴 건, 해연 길드장 한유현이 그의 마수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 있던 중에 생긴 일이었다.
지구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던 시스템에 오류가 나는 바람에 과거에 멸망한 다른 세계의 특징이 지구에 적용이 되어버렸다고, 신입은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놀라서 던전으로 달려온 한유진에게 이 세계에 벌어진 일의 원인을 설명했다.
시스템이 워낙 오래 되어 삼십 년간 버려져 있던 사냥꾼의 오두막처럼 여기저기 삐거덕거리고 있는 건 진작 알고 있었기에, 신입의 울음 섞인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깨끗한 아이보리색 벽지가 회색빛으로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맞이해야 했다보니 신입의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유진의 당황이 바로 가시지는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열심히 눈밭을 통통 튀어 다니는 배구공도, 발밑에 밟히는 뽀득거리는 눈도 그들을 둘러싼 설원의 나무까지. 세계의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채인데 어떻게 바로 납득하고 진정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파랗지 않고, 피부가 살굿빛이 아닌 세상 같은 건 25년 아니, 30년 평생 살아본 적이 없는데. 이 세계에 냉큼 적응하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
하지만 자신의 설명에도 여전히 유진의 미간에 고인 불편함이 풀리지 않자 당황했는지, 결국 배구공은 눈물을 흘리는 표정을 띄우면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지금 최선을 다해서 복구하고 있으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ㅠㅠ’ 라는 애원으로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제법 절절했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결국 유진의 마음도 풀어졌다.
색을 못 보니 당연히 생활하는 게 꽤나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당장 죽는 것은 아니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오류라면 결국 원래대로 돌아올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굳어있던 입매를 느슨하게 하려던 순간이었다.
“아! 이 세계의 법칙대로면 운명의 사람을 만나면 다시 색을 볼 수 있게 될 거에요!”
신입은 조금이라도 빨리 유진이 색을 보게 되는 방법을 떠올렸을 뿐이리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갑자기 번뜩 외친 신입의 그 말이, 유진에게는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심지가 되어버렸다.
*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색이 보이는 세계, 라는 것이 그리 로맨틱하지 않은 세계라는 걸. 한유진은 짧은 시간 동안 난리가 난 세계를 보고 절절하게 깨달았다.
배우자와 함께 있어도 색이 보이지 않자 싸우다가 이혼을 결정했다는 커플의 이야기부터. 친구의 애인과 만난 순간 색이 보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 지금의 애인이 운명의 상대라고 확인받은 것 같아 기쁘다는 자랑이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는 간증까지.
대체 그놈의 운명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마치 그 단어에 낚여 펄떡이는 물고기 같았다.
신입이 말한,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약 일주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주일이 채 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이렇게나 난리가 났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들도 운명이 아니라는 말에 휘둘려 이혼을 했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도 운명이라는 말에 연애를 시작했다. 적어도 제정신이었을 때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을,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덧씌워지자 거침없이 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사건들을 보며 유진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일들과 자신은 상관이 없는 양 굴었다.
하지만 드디어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이 던전 공략을 끝내고 나온다고 연락이 왔을 때, 유진은 처음으로 사람들의 그 광기에 찬 선택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만약, 내가 유현이의 운명이 아니라면 어쩌지?
한 번 마음에 깃든 의심에 술렁이기 시작한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운명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과 동생이 겨우 이런 일로 관계가 흔들리거나, 다른 이들처럼 파국을 맞이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운명이 아니라도 한유현은 자신의 동생이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동생의 운명의 상대라면, 당연히… 더욱 좋겠지만. 아니라면 운명이 아님에도 동생이 자신을 선택해줬다는 사실을 기뻐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유진은 유현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하지만 신호등의 색이 구분이 가지 않아 임시로 경찰들이 직접 교통정리를 하며 차들의 운행을 돕고 있는 도로를 지나다 보니 갑자기 덜컥 어떤 생각이 유진의 머릿속에 들어앉았다.
나 말고 유현이의 진짜 운명의 사람이 있으면?
만약 지금 자신이 유현을 보는 순간 색이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아닌 누군가, 한유현에게 더 올바른 운명의 짝이 있음을 선고받는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이성적으로 마음을 정리하던 한유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마냥. 온갖 위태로운 가정들이 일렁이며 유진의 이성을 헤집어 놓았다.
불안은 이미 뚜껑을 닫아도 소용없는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몸 전체에 불안이라는 검은색 물이 가득 차서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잠시 참에서 내리지 못했다. 초조함에 주저하다가 간신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도착하기로 예정했던 시간보다 한참 늦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형!!”
유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달려 나온 유현이 차문을 닫고 있던 유진의 뒷모습을 알아보고 냉큼 소리쳐 유진을 불렀다. 반가움이, 애정이. 잠시 떨어져 있던 동안에 어김없이 차오른 그리움이. 그 모든 것들이 가득한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으면 한유진이 아니리라.
유진은 자신이 여태껏 걸음을 주저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색 머리카락이, 은은한 불의 열기가 감도는 검은 눈동자가, 다행히 어디 한군데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깨끗한 흰 얼굴이, 자신을 부름 기쁨에 젖어있는 붉은 입술이. 그 환한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유현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질 뻔한 것을 유진은 동생을 와락 끌어안는 것으로 감추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역시 내가, 운명이었어. 유현이에게 다른 사람은 없어.
그런 안도감이 손끝까지 들어차고, 기쁨으로 가득한 심장이 너무 격렬하게 뛰어 대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한유현을 되찾기라도 한 것 마냥.
“형, 무슨 일 있었어?”
유진은 자신이 지나치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유현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유현이 S급 헌터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너무 아프게 끌어안았다며 불편함을 표시했을지도 몰랐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걸 알면서도, 형의 손가락이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형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마주 안은 형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대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 형의 품에 강하게 끌어안긴 것이 싫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유진의 손 힘은 그런 다정한 스킨십이 아닌, 전혀 다른 이유로 인해 허무하게 풀리고 말았다.
[허니 >ㅁ< 힘내서 수리를 일찍 끝냈어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제 것이라 운명으로 확인 받은 동생을 끌어안고 그 감격을 즐기던 한유진의 눈앞에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그것을 앞에 두고 유진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시선을 살짝 들어 저를 마주안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온갖 기쁨의 색이 가득 떠올라 있는 동생의 시선이 부드럽게 유진을 담아왔다.
“다녀왔어, 형.”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
“그랬구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유진은 유현이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형의 상태가 걱정된다며 자신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말한 유현 때문에 유진을 태우고 차를 운전해왔던 해연 길드원은 다른 차로 이동하고 있어, 차 안에는 한유현과 한유진 단 둘 뿐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이제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신호등의 선명한 초록색을 바라보던 유진은, ‘네가 없던 사이에 큰일이 있었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없던 사이에 세계가 조금 바뀌었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다소 어수선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제 괜찮아졌으니 네가 회색빛 세계를 볼 일은 없을 거라는 말.
천천히 말을 늘어놓고 보니 무슨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사랑의 묘약에 휘둘려서 난리를 쳐댔던 요정들과 운명이라는 단어에 휘둘려 난리를 쳐댄 인간들이 제법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바탕 소동이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기에 유진도 이런 말을 입에 올려볼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만약 아직 시스템이 안 고쳐져서 내가 네 운명이 아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아까 전에는 혹시 아니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으면서. 막상 이제 더는 운명인지 아닌지 알아 볼 방법이 사라지고 나니 이런 질문이 오히려 가볍게 잘도 나왔다.
인간은 오히려 확실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물음 앞에서 상상력이 더 가볍게 뻗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상상을 하든,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없으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마음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뭐, 어때?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인데. 그런 면죄부를 얻고 나면 상상에 붙은 날개가 더욱 거대해졌다.
한유진은 그런 스스로가 우습긴 했지만, 어쩐지 물음을 던지고 나니 동생의 답이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잠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어떻다니?”
“말 그대로. 내가 네 운명의 상대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유진의 물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목소리 가득한 의문이 너무도 깊었다.
그래서 유진은 순순히 제 질문을 보충 설명했다. 급하게 설명을 기워낸 말을 듣고 나서야 유현은 질문을 이해한 듯 했지만, 여전히 이런 질문을 던진 유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그대로의 목소리로, 유현의 입술이 단호한 말을 뱉었다.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고 해도 형은 형이잖아.”
“어?”
“형이, 내 형이라면 다른 건 상관없어.”
그 말을 유진을 설득하려는 듯 차를 멈추고 진중하게 했더라면,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현은 운전을 위해 정면을 응시한 채로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주 당연히 답이 정해진 말을 하는 것처럼.
자신은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물었는데, 동생에게는 이미 확고한 답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의 색처럼, 늦여름을 간직한 가로수의 푸른빛처럼, 이 세상을 이루는 너무도 당연한 빛깔들을 닮은.
“나한테는 형만 있으면 되니까.”
두 사람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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