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쿠로코는 침대에 길게 엎드려서 보고 싶었지만, 기말고사에 쫓기느라 보지 못했던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 위쪽에 달린 에어컨에서 연신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와 방 안을 채운 덕분에 침대시트에 살이 닿는 부분에서도 땀은 나지 않았다.
뽀송뽀송하게 말려둔 시트에 닿는 피부는 서늘했고, 손끝에 닿는 빳빳한 종이 또한 서늘하게 식어 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움직임은 더욱 가벼워졌다. 더군다나 책의 내용 또한 훌륭해서 문장을 읽을수록 내용에 빨려들어 가기라도 할 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쿠로코의 옆 자리에서는 아오미네가 농구 잡지를 들고 누워서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사실 아오미네는 잡지를 읽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잡지 페이지를 훑어보는 시선이 읽어내는 글자는 없었다. 그저 쿠로코의 옆자리를 사수하고 누워있고 싶어서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었던 농구 잡지들 중에 하나를 잡아 자리를 잡았을 뿐. 그렇다보니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잡지를 멋있게 장식하는 사진을 눈으로 훑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오미네는 불만은 없었다.
방학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3일째. 자칫하면 방학이라 쿠로코를 전보다 자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달리 쿠로코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고. 그 옆에 찰싹 달라붙듯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좋았다. 그저 다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마음껏 만끽하며 곁에 있는 이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종이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 것은 그런 행복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오미네가 넘기던 잡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낡은 종이는 아오미네가 팔을 쭉 뻗어서 얼굴 위로 잡지를 들고 있던 탓에 그대로 잡지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아오미네는 제 얼굴 위에 갑자기 떨어진 그 종이에 놀라 눈을 질끈 감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뭐야! 깜짝 놀라 외친 목소리는 책에 한참 집중하던 쿠로코의 귓전을 찰싹 때려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아오미네가 제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침대 바닥 아래로 던져버리고 팔을 굽혀 얼굴에 있는 종이를 잡은 것보다 옆에 있던 쿠로코가 팔을 뻗어 종이를 집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읽던 책에 책갈피를 꼽아 덮고 종이를 잡은 쿠로코의 시선은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는 노트의 한 페이지를 죽 찢어낸 것으로 보였다. 꽤 오래 그곳에 끼어 있었는지 구겨진 곳 없이 빳빳하긴 했지만, 그 종이 쓰여 있는 글씨의 색이 살짝 번져 이것이 꽤나 오래 전에 쓰인 글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리고 쿠로코는 곧 그 종이가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지 선명히 기억해냈다. 그것은 어느새 쿠로코의 옆에 엎드려 종이에 시선을 둔 아오미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오미네 군.”
“응?”
“갈까요? 바다?”
곧게 편 쿠로코의 검지가 짚어낸 곳은 종이의 윗부분이었다. 아주 커다란 글자로 쓰여 있는 ‘여름방학에 할 일’이라는 삐뚤빼뚤한 글자 아래 있는 숫자 1. 그 숫자 옆에 쓰인 글씨 또한 최상단에 있는 것과 같은 글씨여서 두 가지가 한 사람에 의해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쿠로코는 그 글씨를 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지 직전, 그렇기에 방과 후 농구부 연습도 없었던 어느 날. 노을에 물들어 오렌지 빛을 띠고 있던 종이 위에 신나서 여름방학에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내려가던 펜의 움직임. 그 펜을 꼭 쥐고 있던 손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웃는 얼굴.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선명했고, 결국 이때 세웠던 계획을 무엇 하나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전국대회 직전의 일이었기에.
아오미네는 가만히 쿠로코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숫자 1번뿐만 아니라 그 뒤로 2, 3, 4로 죽죽 이어지는 다른 계획들도 주욱 읽어 보았다. 익숙한 글씨가 적어둔 계획들은 제법 많아서 노트의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지금 보면 한없이 소소하지만, 무엇이든 지금 제 옆에 있는 이와 함께 한다면 즐겁기 그지없을 일들뿐이었다. 결국 그 시절에는 이루지 못했는데…… 그랬는데 어째서 이 희망들에는 아직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꿈이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을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꿈들은 흐르지 못하고 이 노트에 고여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꿈으로 만들어진 연못처럼. 그리고 쿠로코는 조금 늦었더라도 기꺼이 그곳에 함께 빠지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가자.”
퐁당, 기꺼이 그곳에 함께 빠져 잠기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는 아오미네가 웃었다. 그가 곁에 있는 동안은 결코 썩지도, 낡지도 않을 중학교 시절의 희망을 곱씹으며.
짧네요. 오랜만의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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