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위험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힘없는 황제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의 아들. 그것만으로도 후궁들의 질투를 사기에는 충분했기에.
황제가 황자였던 시절 공부를 하기 위해 찾아갔던 먼 나라의 여인이었던 황후는 황제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이 나라를 찾아왔다. 대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겠다는 황제의 고집은 꺾이지 않아, 그녀는 결국 황후의 관을 받을 수 있었다. 타국의, 그것도 사막의 사람들과는 피부색도 머리색도 눈색도 어느 것 하나 닮은 것 없는 여인이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길고 긴 제국의 역사상 처음이었다.
다만, 그녀를 황후로 삼기 위해 거슬렀던 대신들의 심기를 다독이기 위해 결국 황제는 비워두었던 제 하렘을 가득 채워야 했다. 어느 대신의 딸, 어느 대장군의 딸, 어느 귀족의 딸. 관리되지 않았던 하렘의 곳곳에 자리 잡게 된 여인들이 처음으로 황후에게 인사를 왔던 날, 다행히 그녀는 의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날 밤 제 침소에 황제가 걸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저 홀로 남은 그 장소에서 눈물을 훔쳤을지, 저 먼 사막 너머에 있는 어딘가를 제 파르란 눈으로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의 첫 황자는 그로부터 6달이 지난 날, 태어났다. 제 배 속에 아이를 품고도 그 모진 상황들을 겪었기 때문일까? 황자를 낳은 뒤로 급격하게 몸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황제를 쏙 빼 닮은 황자는 그 눈에만 어머니의 푸른색을 옅게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검은 눈에 푸른빛이 섞인 그 눈동자가 마치 사막의 밤하늘 같다며. 아이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어여뻐했더랬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은 마치 새싹에 내리는 물과 같아, 다행히 황자는 어디 한군데 아픈 곳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모든 것을 황자에게 내줄 것처럼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던 그녀는 결국 황자의 9번째 생일이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생명이 다하고 말았다. 바다가 가까웠던 제 고향, 그녀는 끝나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막에 잠들었다.
황제가 실의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제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보다 더 황후를 사랑했기에.
실의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황제는 자신 외에는 황자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 간과했을지도 몰랐다. 주변이 온통 적들뿐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 했다. 그 때문에 마주치기만 하면 시비를 거는 배다른 형제들과 독살스러운 눈으로 제 1황자를 바라보는 후궁들의 눈초리를 조금도 막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런 시기였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는 어린 아이. 하지만 아이는 주눅 들기는커녕 독이 바짝 오른 뱀처럼, 저를 찾아온 낯선 이를 쏘아보며 내민 손을 쳐냈다.
‘하렘의 머저리들이 보낸 놈일게 뻔하지. 시종 따윈 필요 없으니 꺼져!!’
하지만 보여서. 채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의 외로움이. 토해내지 못한 슬픔이. 그것들이 보여서 도저히 아이를 두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혼혈이라 주변으로부터 받았던 경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아이를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켜주자고, 이 작은 황자를 지켜내서 이 나라의 정점에 서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고. 그렇게 결심했더랬다.
그 결심은 사막에 떠오른 북극성과 같아서. 오로지 북극성만을 보고 길을 걷는 여행자처럼 그 뒤로 황자를 따랐다. 그 아이가 마음을 열고, 결국 제 곁을 내어줄 때까지.
보살피고, 가르치고, 이 아이가 자신의 북극성뿐만 아니라 대신들에게 삼켜진 나라를 구원하는 북극성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비키세요!!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서기관님, 잠시 진정하시고……”
“비키라고 했습니다!!!”
저를 어떻게든 막아서려는 병사들을 물리치고 들어간 막사 안에는 흰 천에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이곳이 분명 황자가 원정 중에 사용한 막사였고, 자신 또한 몇 번이나 들어온 곳이었는데도 그 천 안에 숨겨진 것으로 인해 이 장소가 낯설어졌다. 다른 남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황제의 하렘에 들어가도 이것보다는 이질감이 덜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발목을 잡아채는 불길한 기운에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었기에, 제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래, 착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쟁터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없는 장소던가. 누군가 잘못보고 다른 사람의 시신을 가져다 놓은 걸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의 시신이라면,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보고 황자가 아니라 말을 해줘야 했다.
분명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이 천을 걷어서…… 그래서……
“아… 아……”
“서기관님!!!”
천 밖으로 드러난 얼굴을 바라보다 무너진 몸을 누군가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흔들흔들, 그 움직임에 몸과 머리가 함께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만 하라는 말 한 마디를 뱉어낼 수가 없었다.
입가에 흥건한 핏자국이, 가슴에 남은 칼에 꿰뚫린 상처가, 눈앞에 내밀어진 그의 죽음이 너무도 선명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멍울진 울음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고, 더 이상 눈앞의 광경을 보지 않기를 원하는 주인을 위해 눈동자에서 눈물만이 흘러 시야를 가렸다.
제 별은 죽었다. 이제 염원의 하늘에 떠있던 단 하나의 북극성은 사라진 것이다. 삶의 길은 잃는 것은 이렇게 순식간이었다.
“……츠…”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앞으로의 제 삶보다, 단 하나 그의 죽음 이전에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웠다.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마저 외롭게 보내버렸다. 어두운 미래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더욱 가슴 아파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테…”
차라리 눈이 멀어버렸으면. 이대로 다시는 그의 죽음을 목도하지 못했으면. 끊이지 않는 눈물로 범벅이 된 제 얼굴을 피로 흥건한 그의 가슴에 얹고 눈을 감은 채로 그는 바라고 또 바랐다. 이대로 눈감은 채 숨이 끊어지기를…… 그리하여 제발 신에게 가는 외로운 길을 그 혼자 걷게 되지 않기를……
“…테츠!!”
계속 흔들리던 몸이 갑자기 일으켜 세워졌다. 그는 제 몸을 흔들던 병사의 손길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아직 구분되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결국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멈췄던 심장이 그때부터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거친 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허억, 허억,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물에 빠진 것처럼 젖어버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뭐야, 왜 이렇게 울어? 악몽이라도 꿨어?”
얼굴을 더듬어 땀과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거친 피부와는 다르게 한 없이 다정하게 움직였다. 저를 받쳐 안은 품 안에서 조용히 눈을 끔뻑이던 쿠로코는 그제야 흐리던 시야를 정돈하고 저를 바라보는 이를 눈에 담았다.
“……아오미네 군?”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스스로 몸을 일으킨 쿠로코가 아오미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제야 저를 덮고 있는 폭신한 이불과, 아래쪽의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 창문으로 비쳐드는 달빛에 드러난 눈에 익은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본 쿠로코는 무엇이 그리 안심되는 것인지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며 남아있는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냈다.
“그냥… 좀 악몽을 꾼 겁니다.”
“무슨 꿈이 길래?”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뭐야, 그게……”
허탈한 대답에 피식 웃음을 지은 아오미네는 이제는 많이 진정된 것 같은 쿠로코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쿠로코의 한쪽 팔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상의를 입지 않고 있던 탓에 가슴팍에 바로 이마가 닿고, 그 따뜻함에 놀랄 새도 없이 침대에 몸이 눕혀졌다.
“악몽은 그만 꾸고, 이제 그만 자.”
제 몸을 폭 감싸 안고 도닥거리는 손길이 무슨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쿠로코는 이번만은 그의 목소리에 듬뿍 묻은 장난기 어린 웃음에도 별 말 없이 그저 눈을 감았다.
“잘 자, 테츠.”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까 전, 꿈이 끊어지기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심장고동이 쿠로코의 귓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니, 귓가뿐만 아니라 소리가 흘러들어 뜨거워진 눈꺼풀에도 무거워진 머릿속에도 빈틈없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피가 범벅이 되어 고동이 끊겼던 그 가슴과는 달랐다. 지금 이 심장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잘 자요. 아오미네 군.”
나의 북극성, 다시 만난 내 삶의 빛.
울음으로 먹먹해진 목을 울려, 그 생에서는 하지 못했던 인사를 꺼내며 쿠로코는 저를 껴안은 아오미네를 마주 끌어안았다. 이번 생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자신의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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