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쿠로코의 농구

2018년 2월 17일 청흑전력 [새해]

by 자렌Jaren 2018. 3. 3.

*악마X마녀


새해

 

 

새로운 푸른 달이 뜨는 날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 해 동안 찬장에 잔뜩 쌓아뒀던 약재들을 뒤집어엎어 버릴 것은 버려야 했고. 조르륵 늘어선 약병들을 깨끗이 닦아 정리해야했다. 약재실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도 쓸고 닦고. 서재의 책들도 혹시나 저주가 들러붙어 있는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그리고또 그리고

그야말로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잠들기 전까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일 일들 뿐.

평소에는 둘이 지내기도 좁지 않은 적당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집이 이 순간만큼은 왜 이리도 넓게 느껴지는지. 오죽하면 누가 공간을 잡아 늘리는 마법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을까.

하지만 쿠로코는 마침내 방 정리를 모두 마치고, 거실 소파에 드러눕고 나서야 제가 이전에 지나온 새해 보다 지금이 더욱 힘든지 알 것 같았다.

 

이제, 어머니가 없으니까.

 

둘이 바지런히 손을 놀렸을 때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혼자서 손을 놀리려니 시간도 힘도 배로 들었던 것이리라.

순간 선뜩한 바람이 가슴께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뚫릴 리 없는 구멍이 뚫려 폐를 바깥에서 쓰다듬고 지나가는 이상한 기분. 분명 제 몸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군데 다친 곳이 없지만, 그날 이후로 종종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겉이 아닌 안이 텅 비어버린 느낌에 잠길 때가.

그리고 그 느낌은 마녀라는 이유로 마른 장작 위에서 불타버린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으레 밀려들곤 했다. 광장에서 화형식이 열린 그날 이후로 수도 없이 느낀 감정이지만, 아직도 좀처럼 그 섬뜩함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아직도 제 심장에도 불이 옮겨 붙은 것 마냥 심장이 홧홧해 지기까지 했다.

 

쿠로코는 늘어뜨렸던 팔을 들어 눈 위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죽은지도 벌써 반년이었다. 그녀가 몇 십년간 살아왔던 집이건만 이미 그녀의 향기는 옅어졌고, 사소한 흔적들도 많이 사라졌다. 그녀의 손때 묻은 약병들에는 자신의 지문이 덧묻었고, 그녀가 언제나 맛좋은 것들을 만들어내던 부엌의 식기들은 요리에 계속 실패하는 바람에 쓸 수 없게 되어 내다 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흔적은 쌓이는 것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사라지는 것은 어째서 이다지도 쉬운 건지. 아니, 어쩌면 이제는 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존재가 더 빨리 지워진 걸지도.

 

문득 떠오르는 한 존재의 모습 덕분일까. 타오르던 감정의 불이 서서히 꺼져갔다. 그제야 눈을 번쩍 뜨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직 눈 위에 올려두었던 팔은 치우지 않아 시야는 깜깜했다. 하지만 팔을 치운다고 해도 보이는 풍경은 그다지 변하지 않으리라.

집 안을 싹 청소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져버렸다. 제가 소파에 드러누울 때도 이미 노을의 마지막 꼬리가 창문턱을 넘어 사라지고 있었으니 바깥에는 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집에는 밤이 낮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이니.

더군다나 오늘은 푸른 달이 뜨는 밤이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새해와는 조금 다른 진정한 마녀들의 새해가 시작되는 날. 집 안과 몸을 정갈히 하고 달을 기다려야하는 밤.

적어도 일년 전에는 이 밤에 특별한 의미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진 그 날 이후로, 쿠로코에게 이 밤은 특별해졌다.

 

왜 그러고 있어?”

 

밤은 닮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밤이 특별해지게 만든 존재의 목소리였다.

쿠로코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 쿠로코가 그린 마법진에 반응하여 나타났을 때부터 줄곧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숲에 고인 어둠 같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의 울림 같은. 묵직하게 내려깔리는 음성.

처음 그 소리가 여린 고막으로 깊숙이 밀려들어왔을 때는 긴장으로 몸을 떨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 떨림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공포는 기대로, 두려움은 환희로.

 

쿠로코는 여직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역시나 예상대로 촛불 하나 켜두지 않은 집 안은 이미 밤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쿠로코는 이내 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어둠과 섞여있던 그림자에서 나온 손이 제 한쪽 볼을 감싸는 순간부터, 그의 존재가 점점 선명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니 살해당한 후로 이 집에 찾아올 존재라곤 창문으로 비쳐드는 달빛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명하게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다니. 그가 매일 밤 홀로 찾아오던 달이 토해낸 조각 같다는 생각에 쿠로코는 아주 조금 웃었다.

 

오늘은 여기서 하고 싶어?”

 

딱딱하던 표정에 갑자기 영문 모를 미소가 걸렸기 때문일까. 쿠로코의 얼굴을 위에서 들여다보던 이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달이 뱉었든 해가 뱉었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내내 혼자였던 제 옆자리를 채워주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지.

쿠로코는 괜찮다는 의미로 제 얼굴에 닿은 단단한 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도록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작은 얼굴을 감싸기에는 큰 손인지라 이내 폭, 볼이 손바닥에 감싸이며 그의 엄지가 쿠로코의 마른 입술을 스쳤다.

 

아니요.”

 

침실이 좋습니다.

나른한 유혹 뒤로, 말을 잇기 위해서가 아닌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나온 붉은 혀가 제 입술 앞에 머물던 손끝에 닿았다. 짧은, 얼굴을 손바닥에 싣는 아주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아까 전, 그의 목소리가 처음 들려왔을 때 시작된 열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 자연스레 입술을 열고 상대를 부르고 있었다. 어서 제게 오라고.

 

아오미네 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팔을 뻗었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그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그 팔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옮겨주세요.

이윽고 그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어둠과 완전히 분리된 그가 저를 향해 팔을 뻗은 쿠로코의 몸을 안아 올렸다.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짐을 옮기듯 가뿐히 안아 올려 진 몸이 품에 기대어졌다.

그 모습만 보아도 이미 그의 품에 쿠로코의 마릇한 몸이 안겨든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 뒤에 찾아올 밤의 모습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무척이나 익숙할 것이다. 처음 그와 계약했던 그 밤 이후로 몇 번이나 겪어왔던 것과 같은 모습일 테니.

오늘도 쿠로코는 비집어 열리고, 찢기고 먹힐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악마에게.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삐걱, 삐걱, 낡은 계단을 밟는 걸음이 이어질수록 침실이 가까워져가는 것을 알았다. 한번 계약을 나눈 마녀와 악마가 다시 서로의 계약을 확인하는 것은 1년의 한 번, 푸른 달이 뜨는 밤에.

악마는 마녀의 영혼에 주인의 이름을 아로 새긴다. 제것이라는 증표를 남기는 대신 힘을 빌려주는 계약을 공고히 한다.

하지만 제 영혼을 내어주는 계약을 앞두고도 쿠로코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밀려들었던 상실감을 지우고, 대신 제 존재감을 밀어 넣어줄 존재를 환영하듯 아오미네의 옷자락을 꾹 손에 쥐기도 했다.

그런 간절함이 기꺼워 아오미네 또한 쿠로코 콧날 위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하는 자신만의 마녀를 위해. 작고 외롭지만, 누구보다 곧은 영혼을 지닌 제 주인을 위해.





상세한 계약 방법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