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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쿠로코의 농구

2018년 11월 24일 청흑전력 [버스]

by 자렌Jaren 2018. 11. 24.

[버스]


 

 

쿠로코 테츠야는 버스의 창문이 영화의 필름 같다고 생각했다.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일반적인 자동차의 그것보다 작고 네모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창밖으로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의 이야기가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얇은 프레임을 가진 버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계절.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서 있는 사람. 혹은 처음 보는 낯선 얼굴.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다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강아지의 목줄을 잡고 천천히 걷는 이도 있었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천천히 걷는 이도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스치는 거리의 풍경.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새 익숙해진 출근길의 버스 밖 풍경을 감상하며 쿠로코는 오늘도 평소와 똑같은 아침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한 줄 알았다.

 

잠깐!!! , 젠장!!”

 

버스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쿠로코 또한 당연히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을 창문 가까이 가져가서 버스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쿠로코가 창밖을 바라본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대체 이 아침부터 큰 소리를 내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 내다 본 것이라면, 쿠로코는 지금 제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생각한 그 사람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내다본 것이었다.

착각이겠지.

머릿속을 울리는 가장 큰 생각은 그것이었지만, 심장은 머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냈다. , . 시린 겨울 아침의 공기에 꽁꽁 얼어붙은 줄 알았던 심장이 다급하게 눈을 떴다. 방금 전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손을 흔들어 반가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그가 지금 여기 있을 리 없다고. 이성이 이야기를 해주어도 심장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조절이 되는 것이던가.

 

아저씨!!!! 세워요!! 멈춰!!!”

 

쿵쿵! 다시 한 번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심지어 버스 바깥을 치고 있는 것인지, 단단한 쇠로 된 버스의 몸체를 치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왔다. 그 요란함 덕분이었을까? 드디어 기사님의 귓전까지 바깥의 소란이 닿았는지. 정류장을 출발한 후로 높아지기만 하던 버스의 속도가 천천히 늦춰졌다.

계속해서 똑같은 속도와 똑같은 장면으로 지나가던 잔잔한 일상의 필름이 잘려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영화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리운 얼굴이 가장 오른쪽 버스의 뒷좌석 쪽 창문에 나타났다. 버스를 따라 다급하게 뛰었던 걸까? 서늘한 아침공기에 퍼져나가는 하얀 입김이 버스의 창에 금방이라도 성에를 끼게 할 것처럼 뿌옇게 번졌다. 하지만 그 얼굴이 가장 오른쪽 창문에서 점점 왼쪽으로 다가올수록 입김은 점점 적어졌다. 호흡이 안정되어 가고 있음이 눈으로 보아도 느껴졌다.

그리고 점점, 그 얼굴을 가진 이가 필름의 앞쪽으로 걸어올수록 쿠로코는 그 얼굴을 더욱 선명하게 눈에 담았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색과 새벽빛이 녹아든 검푸른 머리카락. 날렵하게 찢어진 눈꼬리 아래서 사납게 번뜩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예리했다. NBA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TV를 통해서 지켜볼 때면, 항상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그 눈빛. 제게 익숙한 소년 시절의 것보다 한껏 더 매섭고 날카로워진 그 눈빛은 몇 년 전부터 그렇게 아주 먼 곳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쿠로코의 일상 필름 안에 아주 가까운 곳에 그 시선이 있었다.

이윽고 그가 가장 왼쪽, 앞자리의 창문에 나타나고. 덜컹 열린 앞문을 통해 버스의 창문 필름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마치, 영화가 현실이 된 것처럼.

 

테츠……

아오미네 군? , 이 시간에 여기에……

그런 말보다 다른 게 더 듣고 싶은데.”

 

빙긋 웃어주는 입매가 장난스럽다. 분명, 어제 보냈던 메일의 마지막에 적어둔 그 한 마디를 입으로 내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대학을 졸업하고, 서로의 길을 걸으며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도. 그의 마음 정도야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는 사이였다. 자신과 아오미네 다이키는.

 

여기서 말입니까?”

. 뭐 어때?”

 

아직 아침의 서늘함이 남은 점퍼가 어느새 가깝게 다가왔다. 벌어진 팔이 다물리며, 끌어 당겨진 몸은 속절없이 아오미네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은 버스인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분명 이곳에 몰려 있을 텐데. 쿠로코는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릿속의 한 부분은 이내 끄기로 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오미네 군.”

 

언제나 같은 버스, 같은 영화. 하지만 오늘 하루쯤은 이 필름이 로맨스 영화로 변해도 되지 않을까?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은 원래 주변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저, 이렇게 눈앞의 사랑에 몰입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쿠로코는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2년 만에 귀국한 연인을 위해.

 

, 다녀왔어.”

 

연인이 웃었다. 행복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표정이었다.




청흑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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