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꼭 아오미네 군이여야만 합니다.
싫다는 말로 내치기에는 그 말이 너무 유혹적이었다. 단 하나뿐인 애인이, 그것도 새로운 프로그램이 촬영을 시작한 뒤로 너무 바빠서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던 애인이, ‘네가 아니면 안 돼.’ 같은 말을 하면서 부탁해 오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렇기에 아오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노라고. 턱보다 아래에서 저를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커다란 하늘색 눈동자에 홀라당 넘어가서 무슨 일인지도 물어보지 않고 답싹 좋다고 해버렸다.
분명 전에 차기작을 계약할 때 제대로 계약서를 읽는 시늉도 안했더니 ‘ 계약서 똑바로 안 읽을 겁니까?! 그러다가 사기 당해서 팬티까지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라고 일갈을 했던 것도 같은 사람 같은데, 그는 이번에는 아오미네를 향해 어떠한 지적도 하지 않고 얌전히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했다.
그리고는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소까지 보여주며 아오미네가 맡을 역할에 대해서 간단하게 브리핑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약 3화정도 분량에만 등장하는 단역이지만, 주인공에게 무척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키포인트 인물이기 때문에 임팩트가 큰 역할이라고 강조까지 했더랬다.
하지만 사실 아오미네는 제가 맡은 역할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독보적인 기럭지라던지, 대중을 사로잡는 외모가 돋보이는 연기자라는 수식어를 지겹게 달고 다니다가, 죽도록 노력한 끝에 이제는 ‘연기력으로 승부, 모델 출신 편견 깬다.’ 같은 수식어가 붙은 기사까지 나게 되지 않았는가. 어떤 역할을 맡겨주든 잘 해낼 자신이 있었고, 어려운 역이라도 될 때까지 노력할 마음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쿠로코가 저만 바라보며 그 입술을 움직여주는 게 좋았다. 연인이 행복하다면 저도 행복했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그랬다. 쿠로코가 슥, 내미는 계약서에 쓰여 있는 작품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싸인을 한 것은 그래,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기 배우 아오미네 다이키의 순정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분장팀!! 준비 다 됐습니까?”
“네!! 레드 타이거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 순정이었다. 바라만보고 있어도 좋은 연인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순정과 약간의 덜렁거림이 만들어낸 환장할 콜라보레이션.
“소품팀 공들 한번 더 점검해 주세요!”
“오렌지 이글도 분장 끝났습니다.”
사실 TV 프로그램 촬영 현장은 어떤 현장이든 다소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돌아가는 거대한 카메라, 높이 뜬 마이크 붐, 각도를 조절하는 거대한 조명판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어떤 촬영이냐에 따라 때로는 다소 보기 힘든 생소한 것들을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래, 예를 들어 머리 위로 뾰족한 뿔이 솟아난 헬멧이라던가, 동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갑옷이라던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조악한 디자인의 장난감 무기 같은 것들을 말이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불쑥, 분장이 진행 중인 천막으로 들어온 낯익은 얼굴에 초조한 기운이 어려있던 아오미네의 얼굴에도 반짝 반가움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연인의 등장마저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는지, 곧 얼굴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 아오미네의 얼굴을 보던 쿠로코는 분장을 하던 스탭들에게 잠깐 나가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천막을 닫고 들어왔다.
“아오미네 군, 얼굴색이 왜 이렇습니까? 몸이 좋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다기보다…… 하…….”
“그런 역할에 자신이 없습니까?”
역할? 그래, 어제도 제가 싸인을 한 그 계약서의 작품이 맞는지, 테츠가 자신에게 출연해달라고 요청한 작품이 맞는지 몇 번이고 다시 대본을 읽으면서 처절하게 고민한 그 역할 말이지.
쿠로코의 설명은 틀린 게 없었다. 3화 분량에 짧게 등장하지만 임팩트가 있는 역할이라는 것도 맞았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존재인데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서로 다른 편에 속해서 대립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주인공을 구해내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정말… 임팩트가 있는 역할이라는 건 맞았다. 다만,
“특촬이라고는 이야기 안 했잖아.”
“계약서에 서명한건 아오미네 군 입니다만.”
그때는 내가 정신이 나가서 계약서 첫 머리에 쓰여 있는 작품명도 제대로 못 읽어보긴 했지. ‘스포츠 전대 매직 나이트’라는 정말 읽자마자 알아차렸을 그 단어를 못 읽었던 게 맞지. 계약서를 안 읽어서 망한 다음에 팬티 한 장 남는다는 쿠로코의 말을 흘려들은 대가가 이렇게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었더랬다.
“내가 정극만 했던 거 테츠도 알잖아.”
“정극과 특촬이라고 나누어 생각할 필요 있습니까? 어디서든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연기자인 게 아닐까요?”
덤덤하게 받아치는 쿠로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엑스트라도 따내지 못하고 번번이 오디션에서 탈락하던 자신을 일으켜 세웠을 때처럼, 쿠로코의 말은 논리정연하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인기 몰이 중인 주말 연속극의 재벌 3세가 ‘블랙 재규어’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하아……특촬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미지라는 게…….”
“알몸 앞치마.”
“뭐?”
“지난번에 아오미네 군이 침대 밑에 처박아둔 호리키타 마이 사진집 ‘내 여자친구’에 있었던 컨셉 중 하나였었죠.”
이걸로 됐습니까?
비장하게, 자신도 이 정도면 크게 양보를 했다는 듯이 눈을 흘기는 쿠로코의 모습을 보며 아오미네는 눈을 껌벅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뇌가 인식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지금까지 쿠로코와 보낸 밤으로 미루어 그가 상당히 스탠다드한 섹스 판타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의 로망이라 불리며 흔하게 소비되는 온갖 컨텐츠에도 딱히 반응도 없고, 물론 제가 해줄 생각도 없어하던 그의 입에서 알몸 앞치마라니! 알몸 앞치마라니! 쿠로코 테츠야와 알몸 앞치마라는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수억 광년의 거리 때문에 뇌가 이해를 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해 버린 것이다.
“싫다면 다…….”
“내가 할게!!! 됐어!! 나 말고 다른 누구 앞에서 하려고!!!”
싫다면 다른 걸 말하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곡해했는지 황급히 쿠로코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아오미네의 몸에서 절그럭 소리가 났다. 촬영 직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다급해서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수 촬영용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달려있는 장식들이 거추장스러운 소리를 냈다. 거기다가 무게도 제법 묵직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답게 무게 따위는 움직임에 조금의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아오미네는 재빨리 쿠로코의 앞으로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꼭 내가 해줘야 하는 역할이라며. 내가 할게, 그럼 됐지?”
“네, 그럼 가서 스탠바이 하세요.”
“알겠어!!”
약속 꼭 지켜!!!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아오미네의 등 뒤로는 심지어 검은 망토까지 펄럭이며 현실과 그를 더더욱 멀어져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긴 망토를 할까 말까 디자이너와 고심을 좀 했지만, 아무래도 악당 측의 사령관 역할이니 넣는 게 좋겠다고 최종 결정이 된 거였는데. 키가 큰 아오미네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니 그건 쿠로코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더욱 좋은 그림이 되었다.
“역시 제 눈은 확실합니다.”
드물게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며 쿠로코도 곧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야외촬영인지라 급하게 출연자 대기실을 천막으로 마련했었다.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다른 출연진들도 대부분 밖에 나와 있었다.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아오미네를 바라보며 쿠로코는 더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주인공인 타이거 레드 역의 카가미가 연기자들 중에서도 키가 워낙 큰 편이라 그와 친구 역할인 블랙 재규어 또한 키가 크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자를 찾았었는데. 그런 인물을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일에 쩔어 힘든 발걸음으로 집으로 갔던 그날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이상적인 블랙 재규어가 거실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들어 있는 게 아니던가.
괜히 먼 곳만 보고 있던 제 어리석음을 탓했던 지난날을 떠올린 쿠로코는 손에 든 무전기를 통해 한번 더 미흡한 곳이 없나 현장을 점검한 후, 한 발짝 걸어 나갔다. 조짐이 좋았다. 이건 분명, 대박이다. 대박.
그리고 후일, 정말로 특별한 연기 도전이었다며 아오미네의 주가가 오르는데 도움이 된 것도 모자라서, 아오미네가 등장하는 동안 연일 시청률을 갱신하며 정말 대박이 났다. 물론 블랙과 레드의 절절한 우정을 다른 감정으로 소비하는 팬층이 뒤늦게 우르르 몰려들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도 대박이 난 것은 쿠로코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요즘 탐라에서 유행하는 레히삼을 저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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