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우린 행복해질 거니까.
그건 정말 마법 같은 말이었다.
1.
쿠로코는 딱 한 번 아오미네와 함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부활동으로 매일매일 농구를 하고 있으면서, 질리지도 않고 휴일에도 따로 만나서 농구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사실 딱 한 번이라도 농구보다 영화를 택한 적이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긴 했다.
더군다나 그 영화는 스릴러도, 공포도, 액션도 하다못해 애니메이션도 아니었다. 정말 놀랍게도, 농구에 영혼을 판 것 같은 건강한 남자 중학생 두 명이 함께 본,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는 로맨스였다.
사실 그건 그들의 나이에 걸맞은 영화긴 했다. 포르노보다는 상큼했고, 세계 명작동화보다는 끈적했다. 일단 영화가 재미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재미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말에도 수긍하기 힘든 영화였다. 어쨌든 참으로 모든 것이 어중간한 영화였다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신선하긴 했다. 영화가 신선했다기보다는 이 상황과 옆에 있는 사람 덕분에 생겨난 신선함이지만.
이름을 외우기도 힘든 외국 화가들의 전시회, 사람 한 명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 태양빛에 몸 속의 침 한 방울까지 좍좍 말라 버린다는 사막 한 가운데.
아오미네에게 로맨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영화관 관객석은 그런 장소들이나 마찬가지 의미였을 거라는 걸 쿠로코도 알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보적도 없고, 앞으로도 가볼 생각도 없는 장소. 딱 그 정도의 의미였으리라.
하지만 아오미네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쿠로코의 말에 기꺼이 어울려 주었다. 보고 싶은 것이 로맨스 영화라는 말에 의외라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뜨기도 했지만, 이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영화였다. 사실, 영화를 떠올리면 영화에 대한 것보다 아오미네에 대한 것이 더 많이 떠오르는 영화기도 했다.
쿠로코는 남자 주인공이 제 마음을 숨기며 연인에게 이별을 고할 때, 아오미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 갔을 때, 아오미네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꿈틀거린 것을 보았다. 남자 주인공이 더는 날 쫓지 말라며 여자 주인공에게 화를 낼 때는, 화를 참으려는 것 마냥 꽉 쥔 오른손 손등에 파르라한 핏줄이 불끈 서 있는 게 보였다.
장면장면에 일희일비하며 그야말로 푹 빠져 영화를 보는 동안 쿠로코는 영화와 아오미네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그 영화의 각 장면들까지 기억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래서 이렇게 지금처럼 깜짝 놀란 순간에도 번뜩 그 영화의 장면이 기억난 것이리라.
여자 주인공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뒤에서 따라온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끌어안는 장면. 그녀보다 계단 아래에 있었기에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등에 이마를 기대고 있다가 조용히 고백을 했다. 미안했다고, 계속 좋아해서 미안했다고. 포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찾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건, 같은 목소리였다. 아오미네는 중학교 2학년 시절 변성기가 오면서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는데. 그 목소리를 조금 더 깊이 가라앉힌 듯한 목소리였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 동안에 더 낮아지기라도 한 걸까.
갑작스럽게 뒤에서 다가온 포옹과 들려온 낮은 목소리. 그래서였을까? 그 영화가 기억난 것은. 하지만 아마 하이라이트는 다를 것이다. 포기하려 했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제 마음을 고백하는 그런 영화 같은 결말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것은 전중이 끝났던 뜨거운 8월. 아직 욱신거리는 상처의 고통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 메이코 중학교와의 시합을 막 끝낸 직후였다. 그 날 보았던 그의 얼굴과 표정을 떠올린다면, 역시 고백일리 없다는 생각에 확신만이 가득해졌다. 아니, 고백은커녕 지금 제 허리를 끌어안은 양 팔이 그의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없어질 정도였다.
“왜 여기 있어? 여긴 약속 장소가 아니잖아.”
약속? 자신이 그와 그런 걸 했던가?
황급히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그와 약속 같은걸 한 기억은 없었다. 그와 시시때때로 주고받았던 휴대폰 메일함에 기록된 마지막 메시지의 날짜는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아, 됐어. 아무튼 만났으니까.”
약간 투덜대는 것 같던 목소리는 이제 정말 아무래도 됐다는 듯 가벼워졌다. 툭툭, 마치 어깨의 먼지를 털어내듯 상대의 잘못을 가볍게 털어내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애초에 잘못한 게 없지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저 의문만이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부풀어 가느라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쿠로코의 몸이 돌려 세워졌다. 힘이 억센 손이 허리에서 팔을 풀고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려 세운 것이었다.
마치 넘어져서 한번 구른 것처럼, 빙글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뒤에서부터 드리워진 큰 그림자 속에 갇혀 일순 눈앞이 어두워졌다. 마치 한 순간 하늘에 일식이 일어난 것처럼. 하지만 그런 것들에 놀랄 새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뀐 상황을 쿠로코가 정리해서 받아들이기도 전에 빠르게 다가왔으니까.
“테츠.”
이 세상에 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 호칭이 마음으로 파고든 것 또한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를 만날 일이 없어 이제, 죽은 줄 알았던 것이 갑자기 생명을 받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앞의 사람은 그가 맞았다. 아니, 정말 맞아? 맞는 건가?
이상하게 전과는 부쩍 다른 시야가 그의 얼굴을 한번에 담아내지 못했다. 버릇처럼 그의 얼굴이 있을 만한 높이로 고개를 들었지만, 시야에 그의 얼굴이 담기지 않았다. 그저 검은 티셔츠의 목 부분만 가득 담겨왔을 뿐. 위치를 맞추지 못한 고개가 다시 허둥지둥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할 때였다.
“좋아해.”
쿵! 의아함과 불안함에 쿵쿵 뛰던 심장이 일순 큰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턱, 하고 숨이 막히는 듯해 저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벌렸던 것도 같다. 아니, 필사적으로 이 이상한 사태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벌어졌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벌어진 입술로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가볍게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앞에 선 사람의 입술이, 쿠로코의 벌어진 입술을 삼켜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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